본문 바로가기

[이달의 예술 - 문학] 시의 만국공통문법

중앙일보 2017.05.06 01:32 종합 27면 지면보기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천양희 시인은 1965년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시 쓰기의 이력이 50년을 넘는다. 시를 오래 썼다고 해서 더 이상 쓸 말이 없는 시인은 없다. 오히려 어느 나이를 넘기면, 아침에 잠 깨어 일어날 때마다 옹달샘의 샘물처럼 시가 한 편씩 고여 있는 시절이 온다. 시가 쉽게 써진다는 뜻이 아니라 시가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말.
 

천양희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시인들에게는 흔히 ‘시에 관한 시’라고 부르는 시가 한 편 이상 있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는 젊은 시인이 자신의 주제와 방법을 터득했을 때 어떤 감동 속에서 그 터득한 내용을 터득한 방법에 따라 적어 놓는 시라서 ‘시법’이라는 제목이 늘 어울리는 시들이다. 그렇다고 이런 시가 항상 말에 대한 자신감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시에 관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면 시가 벌써 모호한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의 주제와 방법을 터득하는 순간이 시의 모호함을 깨닫는 순간과 겹친다는 것은 시의 오래된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나이 든 시인들도 자주 시에 관한 시를 쓴다. 그러나 시가 무엇인지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가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말한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시를 쓸 때 시가 어떤 방식으로 찾아왔는지를 말한다. 평생 동안 짊어지고 온 주제와 방법을 한 묶음씩 그렇게 방생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올해로 등단 52년을 맞은 천양희 시인. 삶의 고통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해왔다. [중앙포토]

올해로 등단 52년을 맞은 천양희 시인. 삶의 고통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해왔다. [중앙포토]

천양희 시인의 최근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도 시에 관한 시가 많다. 시집 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부터 “새벽에 생각하니 시여 고맙다”로 시작하니 시에 바치는 시인의 우정을 짐작할 만하지만, 반백 년 세월을 혼자 살아온 시인에게 시가 친절했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시 ‘뒷모습’에서는 여자들만 사는 여인국에, 죄를 짓고 가슴에 주홍글씨를 단 여자 죄인들의 마을이 있다 한다. ‘그 여자들은 다리로 우는 벌레처럼 울고 복수개미처럼/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는구나/ 여자들은 절벽 위에 평생을 올려놓고 바람과 물과/ 세월처럼 흘러갔는데 그 여자들의 뒷모습에는/ 하지 못한 말이 씌어져 있었다는구나’. 그 말은 ‘저무는 뒷모습에 노을이 섧구나’라는 한 문장이다. 시는 이렇게 애절하게, 게다가 죄의 형식으로 찾아오니 이 또한 시의 영원한 아이러니다.
 
‘누군가의 시 한 편’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나는 그만/ 아무 생각 없는 듯 쓴 누군가의 시 한 편이/ 너무 좋아서 미울 정도라네/ 눈물의 뼈 같은/ 침묵의 뿔 같은/ 누군가의 시 한 편’. 한 시인이 다른 시인의 시를 알아본다는 것은 시와 관련된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다. 무심하게 쓴 시일수록 더 그렇다. 시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시에는 어떤 시이건 ‘시의 만국공통문법’ 같은 것이 있다. 그 무심함 속에 만국공통문법을 알아본다는 것은 시인이 제 인생을 발견하는 것이나 같다. 말이 시가 되어 날개를 다는 그 순간이 나이 든 한 시인의 등에 저녁노을처럼 섧게 비친다. 공통문법은 그것을 알아본 자에게 늘 슬프고 아름답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