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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프로 독신’에게도 희망을

중앙일보 2017.04.24 02:54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영희중앙SUNDAY 기자

이영희중앙SUNDAY 기자

오랜만에 재밌는 일본 드라마를 한 편 발견했다. 지난해 가을 일본 TBS에서 방영돼 인기를 모은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사진)는 드라마다(한국에선 ‘채널W’에서 방영 중). 독특한 제목은 헝가리 속담에서 왔다는데 확인은 어렵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인생의 정면 승부에서 ‘도망’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의 현실을 발랄하게 그린다.
 
주인공은 미쿠리라는 20대 여성인데, 대학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해 대학원으로 ‘도망’쳤다. 학업을 마치고 계약 사원으로 취직했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자 다시 무직. 얼떨결에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는 히라마사라는 30대 남자의 집에 파트타임 가사 도우미로 나가게 되는데, 하면 할수록 가사일이 적성이란 걸 깨닫는다. 히라마사 역시 미쿠리의 도움으로 삶의 질이 향상됐다고 느끼며 ‘수요’와 ‘공급’의 접점을 맞이한 두 사람. 부모의 귀촌으로 살 곳이 없어진 미쿠리가 히라마사의 집에 입주해 가사일을 하는 형태의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그리고 가사 노동을 돈으로 환산해 월 19만4000엔(약 202만원)의 급여를 받는 진짜 계약서를 쓴 후 둘은 함께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허황된 이야기인데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취업률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일자리의 질은 여전히 좋지 않은 일본의 상황, 결혼 없이 혼자 살거나 동거만 하는 등 삶의 방식은 다양해졌는데 제도나 인식은 미비한 현실 등을 꽤 설득력 있게 그리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는 젊은이’가 사회문제로 제기되면서 일본에선 최근 새로운 결혼의 형태로 ‘연대(連帶) 결혼’ ‘가성비 결혼’ 등의 신조어가 생겨났다. 이 드라마는 실제 이런 결혼을 시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에 대한 (판타지 가득한)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
 
방영 당시엔 ‘프로 독신’이라는 유행어도 만들어냈다. 히라마사처럼 혼자 사는 데 익숙해져 결혼이라는 변화를 피하려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나 프로의 길은 험난한 법. 주거비는 부담스럽고 가사일은 힘들며 부모님에겐 늘 죄책감을 느낀다. 하여 히라마사도 계약 결혼으로의 ‘도망’을 선택한 것이다. 한국에도 ‘프로 독신’은 늘어가지만 이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는 찾기 어렵다. 이 ‘정치의 계절’에도 1인 가구 유권자들을 배려한 선거 공약이라곤 거의 볼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홧김에 ‘연대 결혼’이라도 하고 싶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그저 ‘하늘이 정해준’ 일주일 치 설거지로 주말을 보내는 1인 가구의 푸념 되시겠다.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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