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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동네 민주주의 … 주민에게 마을 사업·예산 결정권 주자

중앙일보 2017.04.24 02:06 종합 12면 지면보기
주민 자치 키우자 
서울 성북구 주민들이 지난해 타운홀 미팅을 통해 올해 주민 참여 예산사업을 선정하고 있다. [사진 성북구청]

서울 성북구 주민들이 지난해 타운홀 미팅을 통해 올해 주민 참여 예산사업을 선정하고 있다.[사진 성북구청]

서울 성북동 심우장(만해 한용운 유택)으로 이어지는 길 한편에 마련된 ‘만해의 산책 공원’(591㎡, 약 179평). 지난 20일 찾은 이 공원 내 비탈(165㎡, 50평)엔 분홍색 복숭아나무 21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성북동 주민 40여 명으로 이뤄진 ‘성북동 마을계획단’(지난해 6월 결성)이 지난달 29일 직접 심은 나무들이다. 당초 이 비탈은 잡풀이 우거져 쓰레기 무단 투기로 몸살을 앓아왔다. 경고문으로도 해결되지 않자 동네 주민들은 올 초 나무를 심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런 뒤 마을계획단은 구 예산 3000만원으로 공원 나무 심기(200만원)를 포함해 총 9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성북구엔 이런 마을계획단이 20개 동 중 8개 동에서 활동 중이다.
 

리셋 코리아 시민정치 분과 제안
쓰레기 투기, 광고판 난립 정리 등
마을 사람 직접 나서 손쉽게 해결
서울·충남·광주 등 마을자치 시동
주민자치, 특정이익 대변 막으려면
자치위원 선정, 추첨방식으로 해야
시민 교육할 ‘정치아카데미’도 필요

중구에선 전체 15개 동별로 주민 30여 명이 모인 ‘마을 골목 협의체’가 활동 중이다. 동네 골목 환경을 바꾸자는 중구청 제안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주민이 스스로 골목 개선 사업을 정하면 구청에서 행정적 지원을 해주는 식이다. 이 활동으로 한때 광희동 먹자골목(200m 구간, 을지로44길)을 빼곡히 차지했던 ‘에어라이트(풍선형 입간판)’ 30대가 지난달 사라졌다. 다산동 주민(다세대주택 30여 가구)들은 무단 투기로 골치를 앓던 골목 쓰레기 문제를 한 달에 한 집씩 ‘쓰레기 관리 당번’을 둬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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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중구 골목문화창조팀 주무관은 “과태료 부과 등으로 구청이 단속을 하면 잠시 효과가 있을 뿐”이라며 “주민 스스로 결정하니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서울시는 올해 25억원을 들여 84개 동에서 주민 참여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주민들이 마을 문제에 직접 나서고 필요한 예산 사업을 자신들이 직접 결정하는 ‘동네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정부 또는 시·구청이 정책을 결정한 뒤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정책을 정한 뒤 위로 전달하는 식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충남도민 400여 명이 참가한 2013년 복지 관련 타운홀 미팅이 열리고 있다. [사진 충남넷]

충남도민 400여 명이 참가한 2013년 복지 관련 타운홀 미팅이 열리고 있다. [사진충남넷]

서울시만이 아니다. 충청남도는 올해 천안시 성정1동 주민자치위원회 등 30곳을 ‘충남형 동네자치 시범 공동체’로 선정했다. 공동체에 참가한 주민에게 동네 문제 해결 방법과 사업 비용을 지원한다. 충남은 내년까지 시범 공동체를 100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선 2014년부터 해마다 두 차례씩 전체 21개 동을 돌며 ‘더 좋은 자치공동체 주민회의’가 열린다. 주민들이 마을 의제를 정한 뒤 주민회의 때 모여 토론과 투표를 한다. 여기서 정해진 방향대로 구청이 사업을 진행하는 식이다. 현재까지 회의에 오른 의제만 700건이 넘어섰다.
 
시민 참여 유도 위해 ‘흔적 남겨주기’ 해야
 
그러나 ‘동네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보완돼야 할 대목이 많다.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주민 모임이 특정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전체 주민의 의견과 동떨어져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이권 사업으로 변질될 수 있어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는 지난해 7월부터 읍·면·동 주민자치위원을 추첨 방식으로 뽑고 있다. 중앙일보·JTBC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시민정치분과 위원인 신용인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민자치위원은 지역 유지의 감투이거나 행정의 하부 기관장 자리가 돼선 안 된다. 추첨제는 관청과 가까운 특정인이 자리를 독차지하던 관행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마을 문제에 관심을 갖는 주민들의 지속적인 참여 유도는 시민 참여 정치가 성공할 수 있느냐를 가르는 사활적 문제다. 전문가들은 ‘흔적 남겨주기’를 제안한다. 김의영(시민정치분과장)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주민 참여 예산제(주민이 직접 사업 예산을 편성하는 제도)가 활성화된 브라질은 주민 제안으로 놀이터가 만들어지면 그들의 이름을 놀이터 명패에 새겨줘 참여 의지를 북돋는다”고 말했다.
 
지자체 앱, 홍보 아닌 온라인 공론장 활용을
그래픽: 김영옥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 김영옥기자 yesok@joongang.co.kr

 
정보기술(IT)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주민 참여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회사 근무 등으로 주민 모임에 참가할 시간이 부족한 주민이 많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평소 느끼던 동네 문제점을 말할 수 있는 ‘온라인 공론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조희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현 지자체별 애플리케이션을 지역 홍보용으로 쓸 게 아니라 주민 공론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앱상에서 주민들이 정말로 관심 있는 생활 정치 의제를 발견할 수 있고, 주민·정부의 소통도 수월해져 주민 만족도가 높은 제도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이런 변화는 IT 강국인 한국에선 정부·지자체 의지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은 ‘시민 정치 교육’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민들이 동네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론 지식을 쌓아주자는 의미다. 이지문(정치학 박사) 연세대 SSK 연구교수는 “시·구청들은 주민 대상으로 스포츠·교양 프로그램만 운영할 게 아니라 헌법·인권 등을 가르치는 ‘정치 아카데미’를 적극적으로 열어야 한다. 수료자에겐 주민자치위원 선정 시 우선권을 주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서울대는 2015년부터 학생들이 동네 현장을 찾아가 동네 민주주의의 보완점을 직접 찾은 뒤 그곳 주민과 소통하는 수업을 진행 중이다.
 
전문적인 동네 일엔 공동체 지원센터 필요
 
동네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시민 교육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전문성이 필요한 사업이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간 지원조직 운영’이 활성화돼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신용인 교수는 “전문가 네트워크를 갖춘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등에서 주민들이 사업 시행 전에 상담·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이런 센터가 관공서의 하부 조직이 되지 않으려면 센터장 임명 동의와 해임 건의권 같은 인사권을 주민에게 주는 방식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동네 민주주의가 자리 잡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동네 민주주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데 이견을 낸 전문가는 없다. 김의영 교수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국민들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했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게 직접 민주주의의 한 모습”이라며 “전국에 동네 민주주의가 정착돼 국민 개개인의 목소리를 담을 때 국정 운영이 한 단계 도약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상연 논설위원, 조한대 기자, 정인철 인턴기자 choi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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