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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선의가 낯선 사회, "사람농사 지으려다 범죄자 될 뻔"

중앙일보 2017.04.20 20:44
“너무 오래 걸렸어. 이번 일로 400살 도사가 된 것 같아.”
 
7년4개월의 법정 투쟁이 끝난 뒤 황필상(70) 구원장학재단 이사장이 급히 찾은 곳은 법원 경내 흡연구역이었다. “원심을 파기하고…”라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선고를 듣는 순간에도 입꼬리만 가볍게 올라갔던 그의 표정이 한모금 긴 담배 연기를 뿜으며 활짝 펴졌다.
 
황 이사장은 “그나마 문제가 해결돼 대학생을 다시 지원할 수 있게 됐다”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흡연구역에서 “엄청 힘들지 않으셨냐”는 질문을 받고는 말문이 트였다. “처음에는 속 무지하게 많이 썩었다. 내가 왜 기부를 해서 범죄자로 몰리나 후회도 많이 했다. 그 뒤론 체념했다. 이 일에만 몰두하면 죽을까봐….”  
20일 대법원 선고 뒤 환하게 웃고 있는 황필상 전 수원교차로 대표. 송승환 기자

20일 대법원 선고 뒤 환하게 웃고 있는 황필상 전 수원교차로 대표. 송승환 기자

 
사건의 발단은 2002년의 선행이었다. 황 이사장은 자신이 설립하고 운영해 온 ㈜수원교차로의 주식 90%(당시 평가액 180억원)와 현금 15억원을 모교인 아주대학교에 기부했다. 전재산에 가까운 돈을 기부하겠다는 이야기에 놀란 아내와 두 딸을 어렵게 설득했다. “‘사람 농사’ 한번 지어보겠다”고 가족들을 설득했는데 재판에 졌으면 두 딸에게 너무 미안해질 뻔했다”고 그는 미소지었다.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그 만의 ‘농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세상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통큰 기부의 뿌리는 그의 인생 자체에 있었다. 그는 자수성가했다. “버티기 인생”이었다고 한다. 1947년 5월 서울 청계천 인근 판자촌에서 태어나 군을 제대한 26살의 나이에 당시 신설된 아주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국비 장학금과 대학의 도움으로 프랑스 국립과학응용연구소로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땄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를 지낸 뒤 1991년 생활정보지 사업에 뛰어들어 수원교차로를 설립했다. 황 이사장은 “만학도로 돈도 없이 공부할 땐 정말 죽도록 어려웠다. 그때 배운 노하우가 버티기다. 힘들수록 힘을 빼고 버티는 거다. 이번 사건도 그 때 배운 노하우가 없었으면 못 이겨냈을 거다”고 말했다.  
 
6년간 733명의 학생들에게 41억 여 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온 구원장학재단에 느닷없는 세무조사 통지서가 날아온 것은 2008년 3월이었다. 세무서 직원에게 “우리 재단의 진실을 알면 (너무 깨끗해서)경악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떳떳했다. 세무조사 결과 증여세 140억원이 통보됐을 때도 “뭔가 문제가 있었겠지. 금방 해결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감사원에 낸 심사청구가 기각됐고, 장학재단의 재산과 계좌를 압류됐다. 2010년 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을 땐 “이제 다 해결됐다” 싶었지만, 이듬해 2심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다시 시작된 악몽.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그의 속은 타들어 갔다. 황 전 대표는 “주식을 팔아서 현찰로만 기부하라는 건지 화도 났다. 제대로 장학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법이 나를 범죄자로 판단해 억울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사회에서 ‘부자의 선의(善意)’는 낯설기만 했고 대법원의 판단도 길어졌다. 자칫 재벌의 편법 증여를 용인할 수 있다는 엄중한 법리는 그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기업가의 선의를 의심할 수밖에 한국 사회의 단상이었다. 그 사이 구원장학재단의 장학 사업은 축소됐고 2015년부터 중단됐다.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눈에 백내장이 생겼다.
주변에선 “개인이 국가를 이길 순 없다”며 포기하라고 했다. “세무서에 힘을 써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황 이사장은 “나는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벌을 내려 달라고 한다. 이런 내 소신 하나로 버틴 힘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몸에서 힘을 빼기로 결심했다. “생각 끝엔 체념만 남더라. ‘그동안 바쁘게 살았으니 국가가 강제로 쉴 기회를 주는구나’ 생각했다. 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승복하려 했다. 때론 다 잊고 책만 읽었다. 그게 사는 길이었다.” 그는 판결을 하루 앞둔 19일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황 이사장은 자신의 변호인단에도 감사를 표했다. 그들을 ‘의인’이라고 불렀다. 전 재산을 잃게 된 그를 무료로 변론했다. 그는 “법률 지식이 없어 더 이상 앞길이 안 보일 때 변호인단이 ‘할 만하다. 이길 수 있다’고 나를 계속 설득했다. 그게 큰 힘이 됐다”고 고마워 했다.
 
황 이사장은 대법원을 나서면서 “새 괴로움의 시작”이라는 말을 했다. “그동안 재단의 재산을 세무서에서 관리해 줬는데 그걸 다시 해야하니 일이 늘어났다”는 행복한 엄살이었다. 그래도 지나간 시간은 아쉽기만 하다. 그의 꿈이자 소명이었던 사람농사가 긴 시간 중단됐기 때문이다. “더 많은 학생을 도울 수 있었다.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많이 길러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제2의 스티브잡스도 키워내고 싶었다. 씨를 잘 뿌리고 있었는데….” 잠시 말을 멈췃던 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이제 다시 기회가 왔으니 500살 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키워보리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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