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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약은 한 끗 차이, 물도 많이 마시면 독

중앙일보 2017.04.19 15:52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독극물 'VX'는 1952년 영국 정부기관 소속 화학자들이 배합해 탄생했다. 김정남 암살에서처럼 미량으로도 치명적이다. 시리아에선 대량 파괴 무기로 이용돼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독과 약은 한 몸, 복용량이 결정적
거의 모든 물질은 독으로 쓸 수 있어
일부 독은 돈, 제약사의 경쟁력 가르기도

VX가 '나쁜 독'의 대표 격이라면 '좋은 독'은 수없이 많다. 제약회사가 만드는 화합물 약도 따지고 보면 독을 이롭게 활용한 것이다. 
 
16세기 독일의 의사로 독극물을 연구하는 독물학(毒物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파라셀수스가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인간을 치료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독(毒)과 약(藥)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둘이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현대 약학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어 주요 화학적 발견이 진행된 19세기를 거쳐 화학·제약 산업이 거대 산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독과 약은 종이 한장 차이
영국은 VX 개발 후 4년 뒤인 56년 화학ㆍ생화학 무기의 포기를 선언해 직접 VX를 쓴 적은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수소폭탄 제조법을 이전받는 대가로 VX 제조법을 공유했다. 구소련도 VX 배합에 성공해 미국과 함께 비축 경쟁을 벌여 긴장도를 높였다. 93년 화학무기 폐기 협정에 따라 두 나라는 VX도 폐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번 태어난 화학물질, 즉 독은 없애기 어렵다. 프랑스까지 4개국만 만들 수 있다고 알려져 왔지만, 시리아나 북한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독과 약의 운명은 한끗 차이로 갈린다. 독의 일반적 정의는 ‘특정 조건으로 개인에게 적대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질”이다. 이때 물질은 대부분 화학 물질이다. 각종 치료제·비타민·해충제 등 우리가 흔히 쓰는 물질까지 아우른다. 이런 독의 특징에 주목한 파라셀수스는 복용량(dose)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독과 약의 차이는 복용량’이라고 굳게 믿었다.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양과 상관없이 해로운 물질도 있기 때문이다. 인체 흡수되지만 배출되지 않는 납이 그렇다.    
 
세상의 거의 모든 물질, 일상생활에서 흔한 물질도 치사량을 넘으면 독이 될 수 있다. 원소주기율표의 표기된 대부분의 물질은 독으로 이용 가능하다. 심지어 물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죽는다. 미국 화학협회에 따르면 몸무게가 70㎏ 정도인 사람의 물 치사량은 6ℓ다. 실제로 물 마시기 대회에서 우승하고 다음날 사망한 사람도 있다. 체내 전해질이 묽어지면서 물중독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빨간약’이라 불렀던 머큐로크롬(정식 명칭은 수은과 브롬의 합성어인 머브로민)엔 독성이 강한 수은이 포함됐다. 수술실에서 소독 방법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 외과 의사가 만들어 상업화한 제품으로, 수십년간 가정에서 애용된 상비약이다. 하지만 미량의 수은도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용이 금지된 것은 불과 몇년 전 일이다.
  
파라셀수스는 ‘광부의 병’으로 불리던 규폐증이 “산의 정령이 내린 벌이 아니라 광물이 증발하면서 생기는 독성에 의한 중독”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 파라셀수스는 흑사병 치료를 위해 환자의 대변을 바늘로 소량 체취해 빵에 넣어 약을 만들어 나눠주기도 했다. 일종의 동종요법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록에 대해서 학자들은 위약(Placebo)효과에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훗날 칼 융이 “파라셀수스는 심리적 치료의 선구자이기도 하다”고 했던 이유다.  
 
독의 조건
독의 연구에 가속이 붙은 것은 19세기 스페인 학자 마테오 오르필리아가 독의 연구에 화학적 방법을 대입하면서다. 20세기 초부터 원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고 세상에 없는 물질을 만드는 인류의 능력에 가속이 붙었다. 그러면서 자연 상태에 있는 독과는 다른 합성독의 수가 무수히 늘었다. 실험대상의 절반이 즉시 죽을 정도의 양을 뜻하는 치사량의 개념도 이때 확립됐다. 
 
특정 물질의 치사량은 LD50(Lethal Dose 50%ㆍ반수치사량)에 수치와 단위를 넣어 표기한다. 이는 실험쥐나 토끼를 대상으로 특정 물질 실험을 해 절반이 죽는 시점을 뜻한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물질의 치사량을 따질 수 있지만 현실적이진 않다.  
 
가령 카페인의 LD50은 150~200mg/kg 이다. 커피로 카페인을 치사량만큼 복용하려면 70잔 이상(한잔을 약 200ml로 가정할 때)을 마셔야 한다. 카페인으로 죽기 전에 물 치사량을 넘겨 죽을 가능성이 높다. 커피는 독으로 쓸만한 물질이 아닌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독
제약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첨단 시설이나 장비가 아니다. 바로 화합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케미컬 라이브러리다. 라이브러리의 규모가 제약사의 경쟁력을 결정짓는다. 이 데이터는 약을 개발할 때 후보물질 탐색 단계에서 상용화 단계까지 합성된 수많은 물질에 대한 기록이다. 
 
합성신약은 결국 무수한 종류의 화학 물질을 합성해보면서 원하는 효과를 내는 물질을 찾는 과정이다. 수천 개의 후보 물질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효과를 발견하게 된다. 
 
가령 백혈병 약을 만들면서 발견한 부수적 효과를 잘 정리해두었다가 암 치료제에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다. 백혈병 환자에게 치명적 효과를 내 쓸 수 없는 화합물, 즉 독이 암환자에겐 약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위해선 배합 과정과 효과를 잘 기록해두고 샘플 보관도 철저히 해야 한다. 새로 배합한 화합물은 특허로 등록하면 나중에 사용료를 받을 수 있다. 제약사가 쓸모있는 화합물을 많이 갖고 있을 수록 신약 개발에 유리하다. 
 
국내에서 가장 큰 제약 화합물 데이터베이스(DB)를 갖고 있는 LG화학 생명과학연구소의 경우 약 13만 종의 화합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약 3만 종이 LG화학의 고유 화합물이다. 94년부터 연구 데이터를 축적해온 결과다. 국내 최대라고 하지만, 화이자와 같은 글로벌 제약사와는 비교가 안된다. 글로벌 제약사의 라이브러리는 수백만 종의 화합물 DB를 보유하고 유지 관리에 막대한 인력과 자본을 투자한다.
 
LG화학 신약연구센터 김회숙 연구원은  “데이터베이스가 많을수록 신약 개발 단계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개발 기간도 줄어든다”며 고 “라이브러리 유지 관리 노하우가 중요해 이에 대한 비밀 유지도 철저하다 ”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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