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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DJ','보통사람 노태우',대선 슬로건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중앙일보 2017.04.19 11:46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개된 대선후보의 선거벽보. 왼쪽부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개된 대선후보의 선거벽보. 왼쪽부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슬로건은 그 시대의 거울이다. 후보의 철학뿐 아니라 시대정신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또 후보가 선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지, 추격하고 있는지도 그 슬로건에서 엿볼 수 있다. 통상 집권당 후보나 1위 후보가 내세우는 ‘안정감’에 맞서 야당이나 추격자는 ‘변화’를 강조한다. 슬로건이나 홍보물에서도 그 전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엔 과거 유례를 찾기 힘든 야야대결, 그 특성이 슬로건에도 반영되고 있다. 

1등은 '안정감', 2등은 '변화'...올해의 시대정신은?

‘대세론’을 타온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든든한 대통령' 구호로 여당 같은 안정감을 내세웠다. 반면 안철수 후보가 '변화''혁신''미래'를 3대 구호로 삼았다. 문 후보는 지키고, 안 후보가 공격하는 모양새다. 조동원 전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은 “디자인도 메시지”라며 “안 후보가 파격적인 홍보물 디자인으로 변화 의지를 보이며 문 후보를 추격하고, 문 후보는 과거 여당의 구호를 내세우는 이례적 상황이 연출됐다”고 평가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여당 후보나 1위 후보들은= 집권당이나 1등 후보는 안정성과 성공론을 앞세운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나라다운 나라’는 전형적인 여권의 슬로건이다. 이 후보는 이를 통해 국무총리 등 자신의 굵직한 경험을 강조하는 한편 상대방인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불안정성을 부각했다. 정당 이름(한나라당)과 비슷한 슬로건으로,든든한 안보나 안정을 바라는 보수 지지층의 성향을 파고들었다. 당시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던 이 후보다운 슬로건이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2007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내세웠던 ‘실천하는 경제대통령’, ‘국민성공시대’ 등은 경기침체를 벗어나 성공하고 싶은 국민의 심리를 가장 적확하게 포착한 슬로건으로 꼽힌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63년과 67년 대선에 출마했던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혁명과업 완수, 조국 근대화’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욕망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2012년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준비된 대통령’을 차용해 ‘준비된 여성대통령’으로 승부를 걸었다. '준비된'에다 ‘여성대통령의 새로움’까지 가미해 안정과 변화를 함께 갈구하는 국민의 이중적 심리를 포착했다. DJ까지 포함해 좌우를 아우르는 ‘100% 국민대통합’ 의미를 극대화하는 효과까지 노렸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 벽보. [중앙포토]

 이번 대선이 두 번째 도전인 문재인 후보의 경우 2012년과 2017년 슬로건이 확연히 다르다. 지난 대선에서 내걸었던 ‘사람이 먼저다’가 문 후보 개인의 철학을 강조했다면, 이번의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은 촛불정국에서 국민이 외쳤던 ‘이게 나라냐’는 질문에 방점을 뒀다. ‘든든한’은 김대중ㆍ박근혜의 ‘준비된’이 변형된 형태다. 지난 대선과 이번 대선 슬로건을 모두 만든 정철 카피라이터는 “이번 대선은 촛불정국에서 국민이 외쳤던 ‘이게 나라냐’에 대한 대답과 과거청산, 미래비전 제시 등 세 가지가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후보 측은 이 슬로건을 중심으로 향후 지지율과 변수 등을 대비할 캠페인을 추가 준비할 예정이다.  
 
 ◇야권 후보나 추격자들은= 야권이나 2등 후보는 ‘변화’를 강조한다. 그래서 선명하고 강력한 표현을 많이 쓴다. 최고로 꼽히는 슬로건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쓰이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처음 도입된 1955년 3대 대선에서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들고 나왔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도록 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불사해 정치는 뒤숭숭했고, 한국전쟁 직후 생활도 궁핍했다. 이 같은 상황에 쌓일대로 쌓인 국민의 불만을 짧고 굵게 담아냈다. 여기에 자유당 이승만 후보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등으로 맞섰다. 1960년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죽나 사나 결판내자’나 1971년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치자’ 등도 비슷한 유형이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후보 노무현’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등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당시 대세론의 주인공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였다. '대세후보 이회창'과 '국민후보 노무현'의 대결 구도를 만든데 대해 당시 캠프에서 홍보 업무를 총괄했던 인사는 “국민후보라는 슬로건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라며 "대통령 슬로건으로만 보면 강력하진 않지만 민주화 운동을 했던 386세대가 반응했다”고 말했다.
 
 이번엔 안철수 후보가 ‘국민’을 자주 앞세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차례 밝힌 안 후보가 내세운 이번 슬로건은 ‘국민이 이긴다’이다. 국민의당 김경진 홍보본부장은 “촛불을 통해 분출된 헌정질서 회복 의지가 모여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만큼 분열과 배제의 정치를 극복하고 통합과 화합으로 가기 위해 국민이 승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약점의 역설 = 역대 대선 슬로건은 ‘여당은 안정, 야당은 변화’이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약점을 오히려 슬로건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87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와 97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준비된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노 후보의 공식 슬로건은 ‘이제는 안정입니다’였지만, 이보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가 더 유명하다. 노 후보가 유세에서 외친 “나 이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말은 화제가 되면서 다양하게 패러디 되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사 제목도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였다. 군정종식과 민주화라는 국민의 열망 앞에 군정 한가운데 있었던 노 후보가 ‘보통사람’인 국민들을 ‘위대하다’고 치켜세우면서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선 것이다.  
 
 DJ 역시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했지만 이를 번복하고 4번째 출마하면서 "또 나왔느냐"는 비난도 받았지만 오히려 ‘준비된 대통령’이란 문구로 이를 극복했다. 당시 신한국당 경선에 패배한 이인제 후보가 국민신당을 창당해 독자 출마, 보수가 분열한 것도 결과적으로 그의 당선을 도왔다. 당시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말이 화제였는데, 이번 대선에서 돌고있는 ‘홍준표를 찍으면 문재인이 된다’는 말의 원조쯤 된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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