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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잠, 높은 사회적 신분의 상징

중앙일보 2017.04.19 03:03 종합 35면 지면보기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산업화 시대의 성공 스토리엔 어김없이 잠 얘기, 아니 잠을 안 잔 얘기가 등장한다. 가령 『김우중과의 대화』를 보면 대우 김우중 회장은 해외 출장 다닐 때마다 늘 부족한 잠을 비행기에서 보충했다. 잠자다 공항에 내리면 그게 곧 출근 시간이었다. 세계를 누비며 일할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발 뻗고 잠잘 시간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잠 줄여가며 초인적으로 일한 사례는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 관련 일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1899)을 쓸 당시만 해도 상류계급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나 국제사회 지도자 등 현대사회의 상류계급은 모두 돈은 있지만 정작 즐길 시간은 없는 바쁜 사람들이다. 바쁘다는 게 부지불식간 높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다 보니 잠자는 시간을 쪼개 일하고 공부하는 건 자랑거리이자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반면 잠이 많으면 게으른 낙오자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잠이 그렇게 쓸모없지 않다는 것, 잠의 가치가 부당하게 폄하돼 왔다는 건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하자면 잠을 덜 자면 우리는 뚱뚱해지고 우울해지고 기억력이 떨어지다가 심하면 죽음으로까지 내몰린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수면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소개하며 잠을 ‘신흥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정의했다. 실제로 잠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21세기의 상류계급은 잠의 양과 질을 확보하는 데 정성을 쏟는다.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돈 많은 사람 중 하나인 제프 베저스 아마존 CEO는 “내가 매일 8시간씩 자는 게 우리 주주들에게도 좋다”며 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애트나(Aetna)라는 미국의 헬스케어 회사는 20일 연속으로 하루 7시간 이상 수면을 취한 걸 증명한 직원에게 최고 500달러를 지급한다. 수면이 창의성을 북돋을 뿐만 아니라 업무효율성을 높여주기에 시행하는 제도다. 미국에서는 수면을 돕는 각종 클래스에, 수면 보조용품 시장 등이 급성장하는 중이다.
 
이렇게 잠이 중요한데도 한국인의 수면빚(sleep debt·누적된 수면 부족 시간)은 남녀 각각 18.5일과 15일로 세계 최고 수준일 정도로 우리는 여전히 잠을 소홀히 한다. 학생과 직장인 모두 만성적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세기라면 혹시 상류계급의 상징이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필요한 잠도 확보 못하는 하층계급의 삶을 사는 것 같아 어쩐지 짠하고 슬프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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