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앙시평] 꼴찌인 유승민에게 보내는 갈채

중앙일보 2017.04.19 03:03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철호논설주간

이철호논설주간

이번 대선에서 불가사의한 대목의 하나는 유승민 후보(이하 경칭 생략)다. 지난 13일 TV토론은 유승민의 재발견이었다. 다른 후보들도 “유승민의 압승”이라 입을 모았고 바른정당에선 “토론혁명이 일어난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지지율은 꼴찌나 다름없는 2~3%를 맴돈다. 오죽하면 “유승민은 안 보이고 딸 유담만 보인다”고 할까. 돌아오라는 지지율은 안 돌아오고 당 내부에서 후보 사퇴론만 불거지고 있다.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
대선에서 제대로 지는 모습을
유승민에게서 보고 싶다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참 보수가 사는 길이 아닐까

유승민이 늪에 빠졌다. 보수층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배신자’ 프레임, 진보층에선 ‘박근혜 비서실장 출신의 부역자’ 프레임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섯 차례 TV토론에도 지지율이 반등할지 의문이다. 솔직히 완주조차 자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미 바른정당은 ‘마른정당’이란 비아냥을 듣는다. 사람과 돈이 말라가기 때문이다. 당내 의원들은 PK(부산·경남)와 TK(대구·경북)로 나뉘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나 자유한국당 쪽을 기웃대고 있다. 득표율 10%를 못 넘기면 고스란히 날리는 선거자금도 문제다. 값비싼 TV광고와 포털사이트 광고는 엄두조차 못 낼 형편이다.
 
지상욱 대변인은 “유승민은 아무리 외롭고 험한 가시밭길이라도 용감하게 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빈말이 아니게 됐다. 자꾸 궁지로 몰리기 때문이다. 우선 안철수가 선거 포스터에서 정당 이름을 뺐다. 대신 ‘국민이 이긴다’는 어깨띠를 둘렀다. 그 의도는 분명하다. 안철수로선 반기문·황교안이 물러난 중간 지대를 차지하자 덤으로 보수표가 넝쿨째 굴러왔다. 보수층의 전략적 투표 덕분이다. 그렇다고 정치공학적으로 바른정당에 손을 내미는 순간 호남·진보 지지층이 빠져나가 치명상을 입게 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만 남았다. 유승민의 설 자리를 갉아먹으면서 ‘국민이 만들어주는 양강 구도’에 기댈 수밖에 없다.
 
문재인 후보도 그제부터 ‘적폐 청산’을 쏙 빼고 ‘통합’을 앞세웠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가 워낙 독한 제초제를 잔뜩 뿌려 놓아 보수 쪽은 궤멸됐다. 정권교체는 야-야의 양강구도로 이미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유권자들은 문재인과 안철수를 놓고 어느 쪽이 더 나은 정권교체인지 저울질하고 있다. 문재인 입장에선 적폐 청산을 고집하다 보수표가 홍준표 대신 안철수 쪽으로 향하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다.
 
이번 대선은 기존 정치문법으로 이해 못할 낯선 흐름이 뚜렷하다. 이념이나 정책이 아니라 특정 후보가 싫다고 다른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인물은 똑같은데 지지층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안철수의 경우 5년 전에는 2030세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5060세대가 표밭이다. 여기에다 유권자는 알파고(인공지능) 수준이고 민심은 SNS를 통해 거의 광속으로 바뀐다. 지난해 총선 때 친박 공천 파동이 일어나자 유권자들은 곧바로 새누리당을 응징했다. 문재인도 경선 과정에서 “(친문 패권이) 사람을 질겁하게 하고 정떨어지게 한다”는 안희정의 분노, 문자 폭탄과 18원 후원금에 대해 “경쟁을 흥미롭게 만드는 양념”이라는 실언이 공개되자 순식간에 대세론이 붕괴됐다.
 
유승민이 문재인과 안철수의 양강구도에 포위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어쩌면 낮은 지지율이 더 곤두박질하는 침묵의 나선에 빠져들지 모른다. 그럼에도 유승민이 제대로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완주하거나 중간에 사퇴해도 좋다. 다만 아름답게 졌으면 한다. 소설가 박완서가 썼듯이 “(꼴찌로 달리는 마라토너의)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지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모습을 유승민에게서 보고 싶다.
 
미국의 링컨은 23세 때 주의원 선거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저는 젊고, 여러 어르신들은 제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그래도 뽑아 주신다면, 저에게 커다란 호의를 베푸시는 셈이고, 저는 그 호의에 보답코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어르신들이 저를 뒷전에 그냥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신다 하여도 괜찮습니다. 저는 너무 많은 실망을 겪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떨어졌다. 하지만 아름다운 패배가 2년 후 당선으로 이어졌다.
 
유승민이 존경한다는 영국의 보수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도 200년 전 이런 유세를 했다. “지역민 여러분, 미안합니다. 저는 당선돼 의회로 들어가면 우리 지역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서슴없이 여러분을 버리겠습니다.” 그러고도 버크는 당선됐다. 정치는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가치를 파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유승민이 승리하는 기적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없이 선거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보수의 가치를 알리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참 보수가 사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철호 논설주간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