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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항모와 미사일 사이, 국가는 없다

중앙일보 2017.04.18 03:28 종합 35면 지면보기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1876년 정월, 왜(倭) 함대가 강화도로 밀려왔다. 조선 조정은 그게 뭔지 몰랐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화륜선이 일렬종대로 올라갔습니다. 기러기처럼 빨라 곧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초병들의 보고를 받고 조정은 쩔쩔맸다. 한반도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됐고 지금껏 그렇다.
 

강대국 전함들이 한반도에 몰려와
무력충돌을 예비하고 있는 이때
정치권은 대권 도전에 여념이 없고
정부는 저 멀리 앉아 수수방관이다
141년 전에도 화륜선에 쩔쩔맸다
지금 도대체 국가는 어디 있는가?

벚꽃 피는 계절에 인간이 만든 온갖 쇠붙이가 한반도에 집결했다. 제3함대 주력인 핵 항공모함 칼빈슨함은 미 대통령 트럼프의 최후통첩을 기다리며 남중국해에 떠 있고, 괌과 오키나와 공군기지에는 전투기와 전폭기가 발진 명령을 대기 중이다. 지난 주말에는 무적 항모 니미츠함이 추가 투입됐다. 일본은 신바람이 났다. 북한 핵의 공포를 이참에 씻자는 듯 첨단 화력을 한반도에 맞췄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랴오닝 항모에 경계태세를 발령했고, 서해상에 잠수함 20여 대를 풀었다. 러시아가 가만 있을까. 푸틴 대통령은 동해를 순항하는 해군정찰선의 감시 영역을 태평양으로 확장했다. 봄바람에 해빙된 블라디보스토크 항만의 일렁거리는 물결을 타고 전함들이 동시에 출렁거린다. 4대 군사대국의 화점(火點)이 겨냥한 곳은 한반도 심장부, 북한은 태양절 열병식을 보란 듯 끝낸 저녁에 미사일 한 발을 쏴 올렸다. 재앙을 자초하는 그놈이 불발이어서 겨우 한숨 돌렸다. 일부러 그랬는지, 진짜 불발이었는지 헷갈린 트럼프는 공격 버튼을 누를까를 고민 중일 터에 정작 한국은 없다. 이게 문제다.
 
누르면 전쟁, 안 눌러도 무장 대치 상태를 벗어날 길은 없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강화도 수호조약 이후 141년 동안 한국인은 초긴장 상태로 살았다. 대륙의 인후(咽喉), 한반도를 누가 선점하는가에 따라 강대국 간 세력 판도가 달라졌다. 더 꼬이고 복잡해진 무력충돌 방정식 속에서 평화를 찾아 헤맨 세월이었다. 평화의 고리를 놓치면 곧 전쟁인데, 우리는 한 차례 살상전을 치렀다. 그런데 전쟁 후 무장 평화 원칙을 깬 것은 정작 한반도 내부, 북한이었다. 핵을 탑재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쏴대는 평양의 무력시위를 억제할 해법은 이제 완전히 고갈됐다. 미국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언터처블 갱단 북한을 초토화하려는 최후통첩이 남중국해에 대기한 까닭이다.
 
결국 전쟁인가? 불안한 질문이 꼬리를 문다. 핵폭탄 위력에 버금가는 ‘폭탄의 어머니(MOAB)’가 한반도에 투하될까? 그 전에 평양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뺄까? 중국은 평양을 제지할 의사, 아니 능력은 있는가? 미·중이 맞붙는다면, 러시아와 일본도 그럴까? 미국 항모를 비웃는 북한 미사일과, 북한 핵기지를 겨냥한 미국 항모 사이에서 한국인들은 밤잠을 설친다. 전쟁이 발발하면 모든 것이 끝장인데, 정작 한국인이, 한국 정부가 끼어들 여지를 잃었다.
 
한반도 최대의 위기 앞에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항모와 미사일에 제발 대선까지만 참아 달라 할 수도 없고, 설령 대통령이 뽑힌다 해도 그가 사태를 더 꼬이지 않게 한다는 확신도 없다. 전운이 닥친 이 엄혹한 시간에 쩔쩔매는 정부, 국민은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러니, 제발 두 가지만이라도 해 달라.
 
첫째, 황교안 권한대행께 호소한다. 외국 주재 한국대사들과 각국 주한 대사들의 비상합동회의를 개최해서 한반도 무력충돌은 인류사의 재앙임을 선언해 달라.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을 꿇어앉혀 주기를 호소해 달라. 설령 그 호소가 먹히지 않더라도 전쟁을 막을 모든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에 특사단을 보내 막후협상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찾아 즉각 실행해 달라. 미국 틸러슨 국무장관과 중국 양제츠 국무위원이 핫라인으로 뭔가 협의할 만큼 사태는 긴박하다.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북·미 협상을 위해 자기라도 나서겠다고 하는 판에, 왜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는가? 국민들에겐 방관하는 정부, 무기력한 정부, 그 자체다.
 
둘째, 대선후보들도 안보표(票)를 파느라 헛된 말싸움만 하지 말고, ‘전쟁방지 합동성명서’를 작성해 즉각 발표해 달라. 전쟁이 코앞인데, 정책 경연대회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발령된 전쟁경보를 접어두고 서로 안보대통령을 자처하는 게 꼭 아동학예회처럼 한가해 보여 하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미국 부통령이 오산기지로 황급히 날아왔겠는가? 믿고 상의할 상대가 없으니 미국도 죽을 노릇일 거다.
 
대통령, 정부, 국회, 말하자면 국가가 수행할 최대의 임무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시리아 참상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발발하면 적어도 1000만 명 이상이 들짐승처럼 죽을 텐데, 강대국 전함들이 한반도 외양에 몰려와 무력충돌을 예비하고 있는 이 마당에 국회와 정당은 대권 도전에 여념이 없고, 정부는 저 멀리 앉아 수수방관이다. 141년 전 화륜선 앞에 조정은 쩔쩔맸다. 항모와 미사일 사이, 도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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