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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투리로 재현한 '맥베스'

중앙일보 2017.04.16 13:38
전라도 사투리만으로 재현한 연극 '맥베스 411'의 공연 장면. 맥베스가 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이다. [사진 아시아문화전당]

전라도 사투리만으로 재현한 연극 '맥베스 411'의 공연 장면. 맥베스가 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이다. [사진 아시아문화전당]

 지난 14일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맥베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자~, 왔능가? 일루 와서 이 왕관을 뺏어봐여? 살아있는 놈은 눈에 띄는 대로 비우 부려 줄텡게.… 해필이믄 니 놈이여? 니 놈만은 피할라고 했는디. 돌아가, 잉?… 거지깔이제? 니 놈 지금 거지깔 하는 것이제?… 으아아아~! 이 오살할 년들! 이 거지깔쟁이들아!”

서울과 호남의 연극인들 힘 합쳐 최초 시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14~16일 공연
"문화도 지방 무시하는 풍토 따지고 싶었다"

 왕 맥베스가 맥더프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포위당한 순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맥베스가 전라도 사투리로 말한다. 맥베스(연극에서는 ‘무장 맥’)와 맥더프(구막)는 물론이고 맥베스를 꾀는 마녀들까지 출연자 전원이 전라도 말만 쓴다.  
연극 포스터의 배우 안석환[사진 아시아문화전당]

연극 포스터의 배우 안석환[사진 아시아문화전당]

공연이 끝난 뒤 맥주집에서 마주 앉은 배우 안석환. 손민호 기자

공연이 끝난 뒤 맥주집에서 마주 앉은 배우 안석환. 손민호 기자

 14∼16일 공연된 ‘맥베스 411’은 전라도 사투리만 사용한 실험 연극이었다. 외국 고전을 사투리로만 공연한 건 국내 최초의 시도다. ‘느자구 없는(뜬금없는)’ 이 연극을 기획한 주인공은 배우 안석환(59). 그는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지방 사람을 촌것이라고 무시하는 풍토가 싫었고, 지방문화가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문화예술도 전라도 사투리는 코미디 소재이거나 변두리 인물의 언어로만 쓰고 있다. 이번 작품으로 표준말이 작동하는 사회적 의미를 따지고 싶었다.”
 그래서 연극은 의외로 무겁다. 전라도 사투리가 질펀했던 영화 ‘황산벌’의 코미디는 없다. 대신 참혹한 결말을 맞는 원작의 주제의식만 오롯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사회적 맥락이 얹히지 않은 날것의 전라도 말은 우습지 않았다. 외려 진솔했다. 남도 판소리에서 느꼈던 한의 정서가 배어났다. 
 ‘맥베스 411’의 더 큰 의미는 서울과 지방 연극인들의 공동작품이라는 데 있다. 안석환, 이해제 연출, 김윤규 안무 등 서울에서 내려온 연극인과 광주광역시립극단 박윤모 예술감독 등 호남 연극인이 힘을 합쳤다. 서울말로 된 대본을 전라도말로 윤색하는 작업은 광주에서 활동 중인 배우 윤희철(57ㆍ곽이)이 맡았다. 윤희철은 “말로만 하던 사투리를 글로 쓰니까 처음엔 나도 읽기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노구 역을 맡은 광주 배우 김종진(63). 그는 극단 미추 창단 멤버로 서울에서 활동하다 귀향한 연극인이다. 손민호 기자

노구 역을 맡은 광주 배우 김종진(63). 그는 극단 미추 창단 멤버로 서울에서 활동하다 귀향한 연극인이다. 손민호 기자

곽이 역을 맡은 광주 배우 윤희철. 서울말로 된 대본을 전라도말로 윤색한 주인공이다. 손민호 기자

곽이 역을 맡은 광주 배우 윤희철. 서울말로 된 대본을 전라도말로 윤색한 주인공이다. 손민호 기자

 출연자 20명 중 13명도 지역 배우였다. 안석환ㆍ이해제 등이 두 차례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는데, 20대부터 60대까지 모두 75명이 지원했다. 이해제(45) 연출이 일화를 소개했다.  
 “깜짝 놀랐어요. 전라도 배우들이 사투리가 안 되는 거예요. 평소에는 사투리로 말하다가도 무대만 오르면 서울말이 나왔어요. 공연에서도 표준말 콤플렉스가 심하다는 걸 실감했어요.”  
 작품은 기대 이상으로 대작이었다. 무엇보다 무대가 압도했다. 이해제 연출이 극장을 처음 보서 “이 거대한 무대를 어떻게 채우나” 고민했다고 고백했듯이 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은 국내에서 꼽히는 규모와 시설을 자랑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를 돌출형으로 제작해 관객이 정면뿐 아니라 양쪽에서도 관람할 수 있게 했다.
'맥베스 411'의 화려한 오프닝 장면. [사진 아시아문화전당]

'맥베스 411'의 화려한 오프닝 장면. [사진 아시아문화전당]

 “기술적으로도 다른 공연이었습니다. 음향은 서라운드 시스템을 처음 시도했습니다. 영화관처럼 입체적인 사운드를 느꼈을 겁니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장비는 좋은데 장비를 능숙하게 다루는 인력은 모자라더군요. 새삼 한계를 깨달았지만 계속 부딪힐 겁니다.”
 아시아문화전당 김희정 공연사업본부장의 말마따나 아시아문화전당은 지역사회 협력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호남과 서울의 문화예술인이 공연ㆍ전시ㆍ축제 등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이 지역 배우들과 함께 톨스토이 원작 ‘홀스또메르’를 무대에 올렸다. 이번이 공연부문 두 번째 협력사업이다.
무장 맥이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 [사진 아시아문화전당]

무장 맥이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 [사진 아시아문화전당]

 제목 ‘맥베스 411’은 원작을 발표한 1606년에서 411년이 지났다는 의미다. 주위의 부추김에 넘어가 욕심을 부리다 끝내 파멸을 맞는 원작의 교훈이 오늘도 유효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창조개혁’ ‘우주의 뜻’ 같은 대사가 잠깐 등장했던 까닭이다. ‘전라도 맥베스’인 줄 알았는데 오늘 우리의 맥베스였다.
 광주=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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