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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입안과 확대에 실증적 증거를 활용하자

중앙선데이 2017.04.16 02:01 527호 19면 지면보기
새 정부에 바란다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기획재정부에서 1999년부터 4년간 근무하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정책실무자에게 필요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보다 빨리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필자가 정부에서 근무했을 당시에는, 97년 외환위기때 한국을 도왔던 국제 채권국들이 한국 정부에 각종 정책들을 도입하도록 정기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특히 이들은 한국 정부에 시장개방 및 규제완화를 요구하면서 종종 맥킨지의 생산성 보고서를 인용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농업이나 서비스 부문은 물론이고, 수출에서 강세를 보여 왔던 제조업조차도 노동생산성이 미국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은 생산성 낮은 피로사회
나은 결실 얻을 정책 마련할 때
IZA 등의 실증적 증거 활용하고
일부에 먼저 적용해 효과 검증

 
과연 이 내용이 사실인지, 또 채권단의 주장처럼 시장개방과 규제완화가 되면 생산성이 높아지는지 알고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초기 미국 생활은 과연 미국의 노동생산성이 한국보다 높은지 의구심을 들게 하기 충분했다. 필요한 서류만 구비하면 한국에서는 30분도 걸리지 않는 운전면허 발급이 미국에서는 담당 직원을 만나는 데까지만 족히 2시간이 소요됐다. 또,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도 한국 담당자들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해 줬다. 이후 학위 과정을 통해 맥킨지 보고서가 사용한 방법상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된 후부터는 더 이상 그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장기 근로가 출산율 저하, 산업재해 불러
그러나 지난해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위에 언급한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낮다”는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됐다. 미국에서는 간단히 처리되는 온라인거래가 한국에서는 거래 때마다 각종 이름 모를 파일들을 설치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곤 했다. 운이 나쁜 경우에는 이런 파일들이 컴퓨터에서 에러를 일으켜 여러 번 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온라인거래 외에도 갖가지 경우에서 비슷한 경험이 이어졌다. 필자라는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필자의 단위시간당 노동생산성이 미국보다 한국에 있을 때 낮아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낮은 노동생산성은 개인이나 기업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개인의 경우 동일한 성과를 얻기 위해 장시간의 근로를 해야하고,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국가 중 하나라는 불명예로 이어진다. 기업은 같은 시간 동안 인력을 고용하더라도 적은 성과를 거둘 수 밖에 없다. 국가 전반에 있어서도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장시간 근로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렵게 하여, 여성인력의 경력단절과 출산율 저하를 초래한다. 또한, 최근 존 펜케이블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밝혔 듯이 장시간 근무는 개인의 건강을 해치며, 집중력 저하로 인하여 근무 중 산업재해를 증가시킬 수 있다. 이로 인해 국가는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 등의 추가지출이라는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시스템을 만들면 한국에서 개인들의 노력이 낭비되지 않고 더 나은 결실을 얻게 할수 있는가? 두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민·관을 막론하고 파급력이 큰 사안, 즉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데이터에 기반한 실증적 증거를 이용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조직이 의사결정 시 실증적으로 높은 효과가 기대되는 정책을 채택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예산이나 인력을 낭비할 가능성이 작아질 것이다. 이런 정책결정은 ‘증거에 기반한 정책(evidence-based policy)’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공공분야 정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특정한 정책목표를 위해 정책수단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정부가 사전적으로 정책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실증적 증거(empirical evidence)를 제시해야 한다. 이런 사전적 평가는 다른 나라나 이전 시점에서 유사한 정책의 효과가 어떠했는지 인과관계를 분석한 연구들을 참고함으로써 가능하다. 최근 세계 실증경제학자들의 네트워크인 IZA가 사회·경제·교육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정책들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논문들을 종합해 보도자료 형식의 보고서(IZA World of Labor)를 일반인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정책실패 밝혀져도 불이익 주지 말아야
둘째, 조직이 내린 의사결정에 대해 엄밀한 사후 평가를 실시하고,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을 향후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책의 집행 방법을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서 무작위 실험(Randomized Experiment) 기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관련된 집단 모두에게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파일럿 단계로 정책을 무작위로 선택된 일부에게만 집행한다. 이후 이들 그룹이 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나머지 그룹과 실증적인 차이가 있는지 통계분석을 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발견한 경우에만 해당 정책을 확대 적용하는 방법이다. 실제 1997년 멕시코 정부가 농촌 빈민 구제를 위해 도입한 프로그레사(PROGRESA) 프로그램은 이런 과정을 통해 확대됐다. 이런 방식의 시행을 위해서는 의사결정 관계자들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면 사후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책임추궁이 두려워서 복지부동하는 ‘변양호 신드롬’이 나타날 수 있고, 또 조직이 정책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해당 정책을 지속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14년 만에 귀국해서 보게 된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97년 외환위기조차 무서운 속도로 극복한 활력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만성적인 과로에 시달리는 ‘피곤사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헬조선’으로 불리는 사회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새롭게 들어설 정권은 조급해 하지 말고 사회 구성원이 체감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을 설계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성공의 경험들이 한국사회가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다시 성장의 활력을 회복하는 단초로 작용하길 기대한다.
 
 
이수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 행정고시를 통해 1999년부터 재정경제부에서 일하다 미국 스탠퍼드대에 유학해 박사과정을 밟았다. 메릴랜드대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2016년 한미경제학회가 수여하는 ‘젊은 경제학자’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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