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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때 국민당 스파이 혐의 받은 예치쑨

중앙선데이 2017.04.16 00:55 527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25> 
1 국민당 조직부장 시절의 주자화.

1 국민당 조직부장 시절의 주자화.

중공정권 수립 후, 예치쑨(葉企孫·엽기손)은 억울하게 죽은 제자 슝다전(熊大縝·웅대진)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효과가 있을 즈음 문혁이 시작됐다. 예치쑨도 다른 교수들처럼 ‘반동학술 권위’로 몰렸다. 홍위병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 터졌다. 말 같지 않은 심문에 시달렸지만, 시작에 불과했다.
 

주자화가 중앙연구원장 시절
연구원 총간사 맡은 적 있어
그의 지시 받았다는 누명 써

1968년 4월, 동북왕(東北王)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측근이었던 개국상장(上將) 뤼정차오(呂正操·여정조)를 조사하던 중공 중앙군사위원회가 예치쑨을 체포했다. 국민당 특무 두목 주자화(朱家驊·주가화)의 지시를 받던 국민당 스파이, 혐의가 어마어마했다.
 
지질학자 출신인 주자화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던 정보기관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과 쌍벽을 이루던 중앙위원회 조사통계국(中統) 국장이었지만 권한은 없었다. 두 기관 모두 실권은 부국장이 쥐고 있었다.
 
예치쑨이 국민당 스파이라는 말에 제자들은 통탄했다. “중국인들의 건망증은 당할 자가 없다. 예치쑨은 어느 당파건 참여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1948년 말, 해방군이 칭화원(淸華園·칭화대 사람들은 칭화원이라는 명칭을 애호했다)에 임박했을 때도 의연했다. 국민당이 일류 학자들을 베이핑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보낸 비행기도 타지 않았다. 선생은 공산당도 교육과 과학을 소홀히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강했다. 국민당 스파이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얘기는 국민당 통치시절로 되돌아간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교수와 법조인들을 중용했다. 무책임하고, 패거리 짓기 좋아하고, 남에게 떠넘기기 잘하는 엉터리들 일수록 발탁되기 위해 기를 썼다.
 
최고학술연구기관인 중앙연구원을 설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82명으로 구성된 원사(院士)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계의 권위자들이 꼴불견을 연출했다. 예치쑨은 흠 잡을 데 없는 과학자이며 순수한 교육자였다. 중국물리학회 회장이다 보니 원사 자리가 저절로 굴러 들어왔다.
 
예치쑨은 주자화가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원장시절 연구원 총간사(總幹事)를 지낸 적이 있었다. 중앙연구원 총간사는 명(命) 짧기로 유명했다. 한 명은 암살당하고, 다른 한 명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연구원 산하 수십 개 연구소를 좌지우지하고, 엄청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2 미국 유학을 마치고 둥난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한 예치쑨(두번째 줄 왼쪽 여덟번 째). 1924년 3월, 난징.

2 미국 유학을 마치고 둥난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한 예치쑨(두번째 줄 왼쪽 여덟번 째). 1924년 3월, 난징.

예치쑨에게 칭화대학은 인생의 모두였다. 칭화대학이라는 무대에서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우수한 교수들을 영입했다. 주자화와도 미국 유학을 같이 떠난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중공 중앙군사위위원회에서 조사받을 때 작성한 자술서를 소개한다. “1918년 8월, 주자화와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주자화는 베이징대학을 다녔다.칭화대학이 파견한 유학생이 아니다 보니 초면이었다. 목적지도 주자화는 뉴욕, 나는 시카고였다. 주자화는 미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독일로 갔다. 같은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다 보니 그저 알기만 할 뿐, 편지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1924년 3월, 나는 6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난징(南京) 둥난(東南)대학 물리학과에 있을 때 주자화가 베이징대학 지질학과 교수로 부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1934년, 중앙연구원 평의회에 참석했다가 지질조(地質組)에 속해있던 주자화를 만났다. 본격적인 왕래는 항일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봄부터 시작됐다.”
3 2016년 5월, 중국은 예치쑨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 [사진 김명호 제공]

3 2016년 5월, 중국은 예치쑨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 [사진 김명호 제공]

 
예치쑨이 중앙연구원 총간사를 수락한 이유는 신임원장 주자화의 성의 때문이었다. 1941년 봄, 장제스는 주자화를 중앙연구원 원장에 임명했다. 국민당 조직부장을 겸하던 주자화는 연구원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원장 대신 업무를 처리할 인물을 물색했다. 예치쑨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유일한 원사였다. 연구업적도 시비대상이 못될 정도로 탁월했다.
 
주자화는 오랜 기간 눈 여겨 본 예치쑨을 자유주의자로 단정했다. “자유, 평등, 정의를 모든 가치의 위에 두는 사람. 재물보다 인간을 존중하지만, 재물이 인류의 교양과 복지촉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변덕이 심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불신하는 사람. 권위가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진리, 이성, 사실을 존중하는 사람. 변화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 타협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비판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 과학구국(科學救國)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인재 양성을 가장 큰 명예로 여기는 사람”이라며 총간사 영입에 나섰다.
 
주자화는 예치쑨에게 총간사 직을 수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절하는 답장이 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유도 분명했다. “나는 칭화대학 소속이다. 칭화대학 총장과 의논해라. 총장이 수락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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