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다

중앙선데이 2017.04.16 00:14 527호 29면 지면보기
공감 共感
날이 풀렸다 싶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앞 냇가를 걷는다. 새벽 첫 빛에 어슴푸레 반짝이는 물살들. 가볍게 뒤척일 때마다 몸속에서 물이 함께 출렁인다. 푸석한 삶을 견디다 못해 물소리를 따라가, 끝내 연어가 된 사내도 있었다. 벌써 스무 해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만 해도 사람이 물고기로 거듭나는 진화도 가능했다고 한다. 윤대녕이라는 소설가가 『은어낚시통신』에서 전해 준 이야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부재
그 슬픔은 혼자 해결할 수 없다
다른 이의 아픔에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의 존재 이유

시내가 강으로 이어지면서, 벚꽃을 이고 아래를 걷는다. 어느새 바람이 따스하다. 희고 붉은 꽃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자, 검푸른 하늘이 투명하게 비친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지, 푸른빛 감도는 하얀 꽃잎이 선명하다. 다리를 쉬려고 벤치에 앉아 물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가끔씩 차들이 지나는 소리가 들릴 뿐, 세상은 온통 고요하다. 바람이 소리를 일으키고 물이 가락을 살짝 얹는다. 안개로 몸을 감싼 강물이 마음을 스르르 빨아들인다. 귀가 예민한 이들은 이러한 물가에서 임 그리는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대 강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 강물을 그예 건너네/ 물에 쓸려 그대 죽으니/ 이제 그대를 어찌하리까.”
 
‘공무도하가’다. 우리 민족의 첫 번째 노래는 물로부터 태어났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부터, 그 죽음이 가져다주는 슬픔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다. 물은 생명이고 또 죽음이다. 어머니의 양수를 헤엄쳐 세상으로 나올 적에는 생명이지만, 저승사자를 따라 삼도천을 건널 적에는 죽음이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낳지 못할 때, 물은 그대로 슬픔으로 바뀐다.
 
『애도와 우울증』에서 프로이트는, 정상적 애도의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슬픔이 잦아들면서 저절로 일상이 회복될 것처럼 말한다. 이 말의 색깔은 새빨가리라. 인간 전체를 잠재적 환자로 보는 의사의 언어밖에 몰라서 프로이트는 거짓을 말한 듯하다. 프로이트는 병을 치유하는 쪽보다는 우울증 환자를 생산해 버린다.
 
사랑했던 이가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죽음을 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살아남은 자에게 영원한 상처를 남긴다. 애도에 정상과 비정상은 없다. 애초부터 애도에는 비정상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를 절대 잊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하며, 제 안에서 타자의 흔적을 영원히 되새김질하는 우울을 불러들인다. 프로이트의 후예들이 돈을 버는 이유다. 죽음에 관한 한 인간은 누구나 실패자로서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죽은 아이를 잊는 부모가 세상에 있단 말인가. 그 역도 마찬가지다.
 
남으로, 남으로 강물은 흘러간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은 한순간도 쉬지 않음으로써 생명의 유한성을 잔혹하게 환기한다. 성인이라는 공자조차 황하의 흐름을 눈앞에 두고 거세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흘러가는구나, 이와 같이!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부터 인간은 언젠가 이 세상에서 자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을 떠올린다. 이것이 우리가 친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진짜 이유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밖에 없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
 
햄릿 왕처럼 죽음을 거부하고 무덤에서 뛰쳐나오더라도, 기껏해야 유령이 되어 ‘나를 잊지 말라’고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햄릿은 이 사실을 알아챘다. 사랑하는 자의 부재는 결국 죽음으로써 자신의 부재가 선포될 때에만 종식된다는 것을. 그래서 햄릿은 복수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를 갈등한 것이다. 친인의 죽음은 어찌어찌 덮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죽음을 도무지 극복할 길이 없었으므로, 광기에 자신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나 보다. 웃음소리가 어느새 길 위에 가득하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불현듯 흐르는 물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냇물의 끝에는 강물이, 강물의 끝에는 바다가, 바다의 끝에는 구름이, 구름의 끝에는 빗물이, 빗물의 끝에는 냇물이 있다. 세상 모든 생명체는 그 물을 나누어 쓰면서 살아갈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혼자 해결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홀로 해소할 수 있었다면, 백수광부의 아내가 남편 따라 죽을 이유가 없었다. 친구의 죽음을 본 길가메시가 모든 것을 내던진 후 산 넘고 물 건너 불사의 비밀을 찾아서 머나먼 땅 끝까지 갈 까닭이 없었다.
 
인류는 망각을 권유하는 대신 기억의 형식으로 타자를 위로한다. 타자의 슬픔을 함께하고 그 우울을 줄일 수 있는 형식을 발명했다. 문학이다. 곽리자고와 여옥은 사랑을 잃은 자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 사연을 세상에 전함으로써, 그 슬픔에 동참했을 뿐 아니라 죽음이 더 이상 사회 속으로 퍼져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슬픔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여전히 타자의 것으로 남겨 놓았다.
 
이 강물이 흘러가 닿는 머나먼 남쪽 항구에는 거대한 배 한 척이 슬픔에 싸인 채 뭍으로 올라와 있다. ‘그만 잊으라’가 아니라 ‘기억하겠습니다’의 형식으로만, 우리는 슬픔을 이길 수 있다. 문학은 슬픔으로부터 태어났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