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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나쁜 기억만 지우는 버튼 있다면 누를 건가요

중앙일보 2017.04.11 09:45 10면
기억은 참 이상합니다. 몇 년 전에 꾼 악몽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어젯밤에 꾼 꿈은 양치를 하는 순간부터 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실 꿈만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에요. 어제저녁 엄마와 한 대화의 내용도 벌써 가물가물, 잘 기억이 안 나죠. 그런데 이상하게 좋아하는 이성 친구와 한 대화는 몇 달 전의 내용도 생생해요. 게다가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더 안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좋은 건 오래, 그리고 나쁜 기억은 영영 없앨 순 없을까요?


인하대 생명공학과 김은기 교수는 “뇌에 빛을 쬐어 원하는 뇌세포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기술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억을 지울 수도 있고 새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죠. 또 푸른 발광다이오드(LED) 빛을 쬐어 우울증·정신질환·치매를 치료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글=인하대 생명공학과 김은기 교수
정리=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프리온 단백질이 장기 기억 만들어
첫사랑이 오래가듯 어린 시절 반복된 기억들이 평생을 지배한다. (‘학교의 아이들’ 1866, 유진 프란시스)

첫사랑이 오래가듯 어린 시절 반복된 기억들이 평생을 지배한다. (‘학교의 아이들’ 1866, 유진 프란시스)

첫사랑의 기억은 평생 간다고 합니다. 또한 첫 입맞춤은 그 짜릿함만큼이나 뇌에 확실하게 각인되죠. 그렇다면 이런 장기 기억이 오래가는 이유는 왜일까요. 노벨상 수상자인 컬럼비아 의대 엘릭 칸델이 2015년 ‘신경과학’ 잡지에 게재한 논문에 의하면 장기 기억은 시냅스(Synapse), 즉 뇌세포(뉴런)끼리의 연결고리가 튼튼하게 ‘땜질’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뇌에 입력되면 그 자극을 받아 특정 뉴런들이 활성화돼 시냅스로 연결되면서 일종의 ‘기억회로’가 형성되죠. 이런 임시 단기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건 회로로 덮이거나 대체돼 약화·감소하며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주 강한 자극은 많은 연결고리(시냅스)가 동시에, 튼튼하게 만들어집니다. 좋아하는 그, 혹은 그녀를 생각하며 가슴 뛰는 일이 매일 반복되면 그 연결고리가 더욱 튼튼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른바 ‘굳히기’ 과정이죠.
치매 뇌 속의 비정상 반점인 ‘아밀로이드’ 입자(청색)와 혈관(적색), 신경세포(녹색). 신경세포는 긴 가지끼리 연결된 시냅스로 다른 세포들과 기억회로를 형성한다.

치매 뇌 속의 비정상 반점인 ‘아밀로이드’ 입자(청색)와 혈관(적색), 신경세포(녹색). 신경세포는 긴 가지끼리 연결된 시냅스로 다른 세포들과 기억회로를 형성한다.

 
컬럼비아 연구팀이 밝힌 것은 연결고리를 굳히는 접착제 성분입니다. 그건 공교롭게도 ‘프리온(Prion)’ 계열 물질이었습니다. 자기 복제를 하는 단백질인 프리온 중에는 스스로 뭉쳐서 세포를 파괴해서 광우병을 일으키는 것도 있죠. 또 이 물질은 치매 유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럼 단기 기억이 약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해마(뇌에서 기억의 저장과 상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의 기억보조 단백질이 줄어드는 탓도 있습니다. 두뇌의 단기 기억센터인 해마의 기억보조단백질(RbAp48)은 나이에 따라 감소합니다. 늙은 쥐에게 이 단백질을 많이 만들게 해주었더니 기억력이 회복될 뿐더러 젊은 쥐 수준으로 좋아졌죠.


그러니까 해마의 기억 유전자만을 자극해서 기억단백질을 많이 만들면 단기 기억이 좋아져서 냉장고 속에 넣어둔 리모컨을 찾아 헤매는 일도 없겠죠. 또 해마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새로운 기억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뉴런의 자극을 감소시킨다면 해당 부위의 기억을 제거할 수 있죠. 최근 뇌 과학자들은 뉴런, 즉 뇌세포 하나하나를 조절하는 신기술을 개발했습니다.
 
2015년 5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놀라운 논문이 실렸죠. ‘어제 일을 기억 못 하는 것은 어제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꺼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문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연구진이 사용한 기술은 뉴런, 즉 뇌세포 하나하나에 빛을 쪼여 자극하는 광(光)유전학(Optogenetics)기술입니다. 뇌 과학 역사 이래 가장 획기적 기술인데, 사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식물은 빛을 받으면 전기를 발생시키며 광합성을 합니다. 광합성 부품 중에 전기를 발생시키는 부분(로돕신)만을 뉴런에 삽입한 것입니다. 따라서 뉴런에 빛을 쬐면 외부에서 전기 자극이 온 것처럼 그 부분의 뉴런이 활성화되죠.  
 
MIT 연구진들은 쥐의 시냅스 형성을 방해해서 ‘미완성’된 공포 기억을 만들어봤습니다. 시냅스가 제대로 안 만들어진 쥐는 당연히 기억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빛을 쬐니 기억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즉 기억은 새로 생기는 시냅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뉴런끼리 연결된 회로에 있었습니다. 시냅스의 중요한 역할은 기억을 꺼내는 것이죠. 첫사랑의 기억은 시냅스가 강하게 형성돼 있어 쉽게 꺼내집니다. 하지만 시냅스가 약하게 형성되거나 아예 형성조차 안됐다면 기억을 못 꺼내는 거죠.
 
1차 세계대전 때의 전방 치료소. 앞줄 왼쪽 병사는 폭탄쇼크로 넋이 나간 모습이다. 이런 충격은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다.

1차 세계대전 때의 전방 치료소. 앞줄 왼쪽 병사는 폭탄쇼크로 넋이 나간 모습이다. 이런 충격은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다.

SF 영화 ‘토탈 리콜(2012년)’을 통해 본 미래 사회는 원하는 기억을 심어주는 일이 평범하게 등장합니다. 이런 공상 영화가 이제는 현실이 됐죠. 캘리포니아대학 연구팀은 2013년 ‘뉴로사이언스’ 잡지에 기억을 심는 방법을 선보였습니다. 역시 방법은 간단합니다. 두뇌는 찌릿한 전기 같은 강한 자극이 들어오면 ‘아세틸콜린’이란 신호물질을 근처 뉴런에 전달해서 일련의 ‘기억회로’를 만들게 하죠. 
 
그런데 전기자극이 아닌 평범한 소리는 쉽게 기억이 안 되죠. 연구팀은 평범한 ‘소리A’를 들려주면서 동시에 전두엽 세포를 빛으로 자극해서 아세틸콜린이 나오게 했습니다. 다음날 그 쥐는 다른 여러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더니 유독 ‘소리A’에만 반응을 보였습니다. 즉, 쥐에게 빛을 쪼여서 ‘소리A’의 기억을 심어준 것이죠. 기억 소거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잠의 신, 히프노스'(1874년·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그의 동굴 침실엔 빛도 소리도 없다.

'잠의 신, 히프노스'(1874년·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그의 동굴 침실엔 빛도 소리도 없다.

이런 뇌 과학 기술은 여러 질환의 치료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중 하나가 우울증이죠. 자살자의 80%가 우울증 환자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왜 우울증이 생기는지는 잘 모릅니다. 최근 광유전학기술로 우울증의 중심 부위인 도파민 생성부위를 자극하면 우울증이 개선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광유전학기술은 암 치료도 거들 수 있습니다. 빛을 전기로 바꾸는 물질(로돕신)을 암세포 수용체에 붙여서 빛을 쬐면 암세포만을 원하는 대로 제어할 수 있죠. 
 
광유전학이 빛을 볼 수 있는 분야로는 치매도 있습니다. 치매는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죠. 치매노인은 오래 전 기억은 남아있지만 최근 기억은 꺼내지 못합니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빈 세상을 사는 것과 같죠.  
 
뇌세포(녹색)와 수면유도물질(GABA)을 생산하는세포(적색).

뇌세포(녹색)와 수면유도물질(GABA)을 생산하는세포(적색).

 
다양한 뇌질환 치료 기술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평상시 좋은 생활 습관으로 뇌의 건강을 유지·증진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울증·파킨슨·치매·자폐증·정신분열증 등 모든 뇌질환의 시작은 뇌의 질병과 노화에 있습니다. 몸이 늙어가듯 뇌세포도 늙어가죠. 하지만 몸을 젊게 만들 수 있듯 뇌세포도 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뇌도 노력으로 건강해진다는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 확인됐죠. 하루 15~30분 정도의 적당한 운동, 과일·채소 위주의 영양섭취, 충분한 수면은 뇌를 유지하고 때론 젊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평생 주기적으로 독서·글쓰기를 한 노인은 기억력이 좋았고 뇌질환, 특히 치매성 반점이 적었다고 합니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머리를 쓰는 지적 활동을 하면 뇌가 젊어진다는 이야기죠.
 
※이 기사는 2015년 10월 11일 중앙선데이에 실린 '악몽은 지우고 추억은 보관, 당신의 기억도 편집할 수 있다'를 재편집했습니다.  
 
뇌 건강에도 중요한 수면
적당히 피로해지면 수면 스위치 켜져
잠든 사이 뇌에 쌓인 찌꺼기 청소
 
필자는 어릴 적에 동네 개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꿨습니다. 그때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 탓에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 꿈은 얕은 잠을 자는 REM(Rapid Eye Movement) 수면 상태에서 꿉니다. 이때 뇌는 거의 깨어 있지만 근육은 역설적으로 완전 마비 상태죠. 꿈에 귀신이 좇아와도 팔다리가 안 움직여 공포의 시간을 경험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잠을 자는 걸까요? 잠자는 동안 뇌는 어떤 일을 할까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만, 잠을 자지 않는 게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또 잠을 잘 자야 몸은 물론 뇌도 젊게 유지할 수 있죠. 최근 학자들은 뇌 수면 스위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죠. 실제로 그곳에 신호를 보냈더니 금방 곯아떨어졌다고 합니다.
글=인하대 생명공학과 김은기 교수
 
수면 스위치가 켜지려면
미국 수면의학회지인 ‘슬립(Sleep)’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잠을 자지 않을 경우 뇌세포가 파괴될 때 나타나는 물질이 뇌에 축적됩니다. 이 노폐물은 낮보다는 밤에 10배나 빨리 청소되죠. 결국 잠을 못 잔 사람은 뇌세포에 찌꺼기 독성물질이 가득 차 있는 셈이죠.

인도의 민족운동가인 간디는 금세 잠드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간디처럼 금세 잠에 빠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지금은 밤이 이슥하니 잠을 잘 시간이란 사실을 알려 주는 생체시계와 잠이 들게 만드는 일정량의 피로입니다.

생체시계는 태양 빛을 기준으로 맞춰지고, 피로물질은 낮의 활동으로 뇌에 조금씩 쌓입니다. 피로물질이 최대가 되면 ‘수면 스위치’가 찰칵 켜지죠. 그러면 뇌세포를 잠재우는 물질이 분비돼 바로 곯아떨어지고, 자는 동안 뇌의 피로물질 탱크는 깨끗이 비워집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네이처 뉴로사이언스(Nature Neuroscience)’ 올 8월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사람의 수면 스위치가 위치한 곳은 뇌간(腦幹) 주변이라고 합니다. 이 부위를 자극하면 가바(GABA)란 화학물질이 방출돼 잠에 빠져들어 버립니다. 이 ‘스위치’가 있는 곳은 호흡·혈압·맥박 등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조절하는 부위입니다. 이는 수면이 생명과 직결된다는 간접 증거입니다.
 
나만의 수면습관도 중요
독일연구팀이 ‘플로스 바이올로지(PLOS Biology)’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노인들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은 음식물 대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슐린 신호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줄이는 알약을 인간 수명 연구에 흔히 쓰이는 초파리(fruit fly)에게 먹였더니 밤새 숙면을 취했다고 하죠. 게다가 몸까지 젊어졌다고 합니다. 현대판 ‘진시황의 불로초’를 수면 연구에서 발견한 셈이죠. 초파리의 수면 유전자는 사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밤에 깨지 않고 푹 잘 날이 멀지 않겠죠.

물론 이런 기술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낮에 햇빛을 보면서 몸을 움직이는 겁니다. 또 정신적 스트레스, 커피·녹차·콜라 등 카페인, 스마트폰의 청색 불빛 등 뇌를 각성시키는 것을 피해 수면 스위치가 잘 켜지도록 해야겠죠. 수면 습관도 중요합니다. 매일 같은 순서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기분으로 잠들면 뇌 속에 그 과정이 각인돼 쉽게 잠이 듭니다.
 
※이 기사는 2014년 11월 9일에 중앙선데이에 실린 '숙면은 불로초, 세상 모르고 자야 몸이 젊어진다'를 재편집했습니다.  
 
김은기 교수(프로필)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인하대 바이오융합연구소(www.biocnc.com)와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바이오 테크놀러지(BT)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인하대 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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