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 당신들이 사과해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2017.04.11 02:44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예리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신예리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엘턴 존이 옳았다. “미안하다”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인가 보다. 백번 사과해야 마땅할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거나 비겁한 변명만 늘어놓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드는 생각이다. 혹시나 그네들은 이미 사과를 했다고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어떤 말이 사과인지 아닌지는 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이 판단할 문제다.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는 아예 사과하지 않는 것만 못한 법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궁금하다. 도대체 왜 그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온 국민을 집단 화병 상태로 방치하는 건 용서 못할 죄
자기 합리화, 법적 처벌 면하려는 계산 속히 벗어나길

#“내가 그랬을 리 없어”의 함정
 
심리학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사람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해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로 인한 책임을 지기가 너무 두렵다 보니 뇌가 저절로 ‘자기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는 거다. 예컨대 “사랑해서 떠난다”는 이별 통보만 해도 그렇다. 대관절 사랑하니까 헤어지자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싫증 나서, 다른 이가 좋아져서 떠난다고 할 경우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게 무서워 “내가 없어야 이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뇌가 스스로 믿게 만든다는 얘기다.
 
사상 최초로 탄핵, 파면된 전직 대통령이 끈질기게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지 모른다. 재단은 나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고, 대기업에 일감을 주도록 알선한 ‘유망 중소기업’이 친구 회사인 줄은 꿈에도 몰랐고, 친구 딸은 도와줘야 마땅한 ‘끼 있고 재능 있는 선수’로 알았어야 본인 마음이 편할 테니 말이다. 때맞춰 20년 전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까지 받은 죄과를 모조리 부인하고 나선 또 다른 전직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도저히 제정신으론 숱한 목숨을 앗아 간 살인자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오히려 내가 제물이자 희생양”이라고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됐을 가능성이 있단 거다.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것일 뿐 지금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더 커 보인다. 그럼 대체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론보다 법이 우선”이라는 계산
 
현실론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경우 자칫 이어질 법적 절차에서 불리하게 작용할까 우려해서라는 것이다. 여론의 심판도 무섭지만 법의 심판이 더욱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정 농단 청문회에 불려 나온 여러 재벌 총수와 고위 공무원, 대학교수들이 하나같이 “몰랐다” “아니다”만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도 그래서일 터다. 그 바람에 상당수는 위증죄까지 덮어쓸 판이지만 당시엔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는 쪽에 희망을 걸었던 게다. 아마 이제는 뼛속 깊이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안이 위중해 처벌을 피하기 힘든 상황인 만큼 그때 그냥 솔직하게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빌었다면 위증죄와 더불어 괘씸죄도 면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위한 꿀팁
 
많이 늦긴 했지만 만약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면 몇 가지 기억해야 할 원칙이 있다. 첫째,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처럼 분명한 사과의 표현을 써야 한다. “유감이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같은 애매한 말은 다시금 분노를 부를 뿐이다. 둘째, 사과는 1인칭으로 해야 한다. “제가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책임을 확실히 떠안아야 하지 “여러분이 이러저러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식으로 애꿎은 상대를 걸고 넘어지면 안 된다. 셋째, 변명은 금물이다. 사과를 하겠다면서 “저도 친구에게 속아서 저지른 일입니다” 따위의 사족을 덧붙이지 말란 소리다.
 
부디 조만간 이 3원칙을 충실히 지킨 사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일말의 관용이라도 베풀고자 하는 국민을 계속해서 집단 화병 상태에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 쌓이고 쌓인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릴 테고, 그런 뒤라야 서서히 용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나.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 없이 무턱대고 미래로 나아가려다 심히 꼬여 버린 한·일 관계만 봐도 자명하다. 누구 하나 반성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데 섣불리 화합부터 얘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