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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한국이 왕따 아니라고?

중앙일보 2017.04.11 02:33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한국이 국제사회의 왕따로 전락했다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론’이 번지고 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 주요 현안을 다루면서 당사자인 한국을 배제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그 근거 중 하나가 미국 대사의 장기 공석. 미국이 얼마나 우습게 보면 대사조차 제때 안 보내느냐는 거다. 마크 리퍼트 대사가 떠난 건 1월 20일. 석 달이 되도록 누가 유력하단 얘기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석 달 되도록 미 대사 내정도 안 돼
소통 강화로 ‘코리아 패싱’ 없애야

소녀상 논란으로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일본 대사가 귀국했다 85일 만에 돌아온 것은 아베 정권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중요한 정권 교체기에 서울을 비워두는 게 말이 되느냐”는 여론에 떠밀려 복귀한 것이다. 대사 파견은 주재국의 정보 수집을 위해서다. 그러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일 대사는 뽑아놓고 한국 대사는 내정조차 하지 않은 건 우리에게 관심이 적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외교 당국은 이런 시각에 눈을 부라린다. 특히 외교부 수장인 윤병세 장관은 분개하는 모양이다. 윤 장관은 지난달 말 간부회의에서 “어느 때보다 한·미 간 소통은 긴밀하다”며 “현실과 다른 코리아 패싱 소리가 안 나오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자 외교부는 다음날 언론 브리핑에서 “한국 등 주요 대사직이 6개월 이상 빈 적은 많았다”며 “이를 한국 중시 여부와 연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 자체는 맞지만 진실은 아니다”가 답이다. 한국을 거친 미국 대사는 모두 22명. 임무 교대 시 후임자 부임이 늦어진 탓에 6개월 이상 공석이었던 건 여섯 번이다. 액면상 “6개월 넘게 빈 적이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첫 공석 사태가 난 건 1955년. 윌리엄 레이시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5개월 만에 물러나자 미국은 일부러 9개월간 자리를 비워놨다. 불만의 표시였다.
 
나머지 다섯 번은 예외 없이 1~2개월 안에 후임자가 정해졌다. 부임이 지연된 건 의회의 인준 청문회가 늦어진 탓이었다. 예컨대 전임자 이임 후 2개월 만에 임명된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이란 콘트라 스캔들’과의 연루 혐의로 청문회에 서지 못하다 8개월 만에 부임해야 했다. 나머지 대사들도 모두 비슷한 이유로 서울행이 지연됐다. 결국 한·미 갈등이 없는 한 이번처럼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외교부는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주장한다. 진상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요, 알고 그랬으면 기만한 셈이다.
 
한·미 간 소통이 긴밀하다는 주장은 더 황당하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윤 장관의 만찬 불발 해프닝은 한·미 관계의 좌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달 말의 첫 공식 방한 때 윤 장관과 만찬을 안 했다. 국내 언론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틸러슨이 초청을 거절했다”고 전했지만 본인 얘기는 달랐다. 틸러슨은 기자 인터뷰에서 “아예 초대받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자 외교부는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구차하게 해명했지만 워싱턴의 미 국무부는 또다시 “초대받은 적이 없다”고 못을 박는다. 여간 볼썽사나운 게 아니다. 이런데도 긴밀한 소통 운운하니 기가 찬다.
 
이뿐 아니다. 윤 장관은 지난해 7월 국회에서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 반발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강한 주장도 있지만 표면적인 게 현실이 되는 건 아니다”며 “중국의 경제제재를 예단할 필요 없다”는 헛짚는 소리도 했다.
 
요즘 한국 외교는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최악이다. 미국과는 주한미군 분담금 및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중국과는 사드 보복, 일본과는 위안부 합의 문제 등이 산처럼 쌓여 있다. 누가 뭐라든 이에 대한 근본 책임은 외교 당국이 져야 한다. 최상의 한·미 관계 운운하기보다는 겸허하게 책임을 인정하고 해법을 찾는 게 도리 아닌가.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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