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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선생 별세

중앙일보 2017.04.11 01:00 종합 23면 지면보기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사진) 선생이 지난 8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94세. 별세 소식을 전한 여성영화인모임 관계자는 “가족으로부터 e메일로 연락을 받았다”며 “연세가 많으셔서 얼마 전부터 요양병원에서 머무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경북여고생 땐 투포환 선수 활약
신문사 기자 거쳐 종군촬영반에
1955년 과부의 사랑 ‘미망인’ 연출

고인은 1923년 경북 하양 출생으로 경북여고 재학 시절 투포환 선수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현 전국체전)에 출전해 39년부터 3회 연속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 단거리와 높이뛰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엄격한 가정의 반대로 이화여전 가정과에 입학했다.
 
이후에도 집안에서 결혼 강요가 이어지자 아예 학교를 중퇴하고 대구매일신문사 기자로 나섰다. 간간이 영화평을 쓰던 그는 윤용균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사 촬영소에서 근무하며 영화계에 몸담게 됐다.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1947)의 스크립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남자들만 북적이는 현장에서 “선이나 보라”며 부모 손에 끌려 나왔다.
 
한국전쟁이 그에겐 새로운 기회가 됐다.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종군촬영반으로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촬영을 경험했다. 현장에서 만난 극작가 이보라씨와 만나 결혼한 후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다. 남편이 시나리오를 쓰고 고인이 연출한 ‘미망인’(1955)이 완성되면서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의 탄생을 알렸다.
 
‘미망인’은 당시 사회 문제로 떠오른 전후 미망인 문제를 여성의 시각에서 섬세하게 다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어린 딸과 살아가는 과부가 매력적인 청년과 사랑에 빠져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내용이 당시 뿌리 깊은 전통 유교 사상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잡지·출판사 등에서 일하던 고인은 9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같은 고인의 사연은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2001)을 통해 재조명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등 활발하게 영화를 연출하던 임순례 감독이 미국 현지 자택을 찾아 선배 여성 감독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았다. 고인은 “‘한 살배기 아이를 들쳐업고 ’미망인‘을 촬영할 당시 죽을 만큼 고생했지만 눈물이 나도록 그 당시가 그립다’고 회고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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