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거진M] '프리즌', 악(惡)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앙일보 2017.04.11 00:00
이를테면 차악(次惡)과 악(惡)의 대결이었다. 최근 한국 영화계의 갈등 양상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의 안상구(이병헌)와 이강희(백윤식)의 대결이 그랬고, ‘아수라’(2016, 김성수 감독)의 한도경(정우성)과 박성배(황정민)의 대결이 그랬으며, ‘더 킹’(1월 18일 개봉, 한재림 감독)의 박태수(조인성)와 한강식(정우성)의 대결이 그랬다. 적어도 차악은 악보다 덜 악하다는 점에서, 갈등 구조에서 선(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악은 극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고, 그럼으로써 결국 악의 붕괴를 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적어도 이러한 대결 구도에서는, 악이라 하더라도 연민이나 공감의 여지가 있다는 측면에서 차악을 긍정하는 공감대가 적용됐다.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는 곧 ‘세상에 완전한 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미몽에서 깨어난 성숙한 어른의 비관적 반영이기도 하다. 선한 얼굴과 내면을 가진 주인공을 극의 전면에 내세우기에는, 어쩐지 그 제안 자체가 순진성의 발로이기라도 하듯 민망한 부자연스러움이 따라오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는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선이 증발한 시대’ ‘믿을 만한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몇몇 영화들은 그 결말에 이르러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내부자들’에서 이강희가 안상구의 폭로에 의해 민낯을 드러내고, ‘더 킹’에서 한강식의 권력이 박태수 때문에 흔들리게 되는 것과 같은 설정이다. 이런 사필귀정의 결말은 어떤 점에서 ‘아직 이 세상엔 공명정대한 공권력과 정부가 있다’는 믿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적어도 정치 검사를 다시 판단할 수 있는 정의로운 검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거나, 적어도 죄 지은 자가 교정 기관에서 죗값을 달게 받으리라는, 상식적 정의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는 것이다.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그런데 최근 개봉한 ‘프리즌’(3월 23일 개봉, 나현 감독)을 보면, 그런 상식적 정의에 대한 기대감마저 무너진다. ‘악을 응징하는 최후의 보루’라 할 만한 교정 기관에서조차 정의가 사라졌다고 믿는 ‘무(無)신뢰 시대의 표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감옥은 잘못을 뉘우치거나 죗값을 달게 받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안전한 범죄의 소굴로 제시된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악의 틈바구니가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교도관도 교도소장도 모두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중 최고는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므로 돈만 찔러 넣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감옥 밖의 세상이 돈에 의해 굴러간다면, 감옥 안에서도 딱히 다를 바 없다. 바로 이 도발적인 논리 위에 ‘프리즌’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프리즌’은 감옥에 갔다고 해서 악이 발본색원되는 게 아님을 전면적으로 보여 주는 영화다. 이 영화가 더욱 문제적인 이유는, 무신뢰 시대에서 벌어질 법한 이런 방식의 사건들이 꽤 개연성 있고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 예컨대 재벌 2세가 교도소 안에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는 것처럼, 권력자들의 특별 사면이 현실인 것처럼, 감옥 역시 부패한 세상의 축소판일 뿐이란 걸 관객이 동의하는 것이다.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 사진=영화사 제공

 
‘프리즌’ 속에 그려진 부패한 세상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선이나 정의를 향한 출구는 없어 보인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를 때까지 관객은 그럴듯한 정의의 출구를 찾기 어렵다. 물론 ‘프리즌’의 출구는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열린다. 게임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듯, 무신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한 질주의 이야기 끝에도 출구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무한 질주의 쾌감 속에서도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는 감옥에서도 악이 갑(甲) 노릇을 한다. 더 악랄할수록, 더 부유할수록, 더 교묘할수록 감옥은 ‘교정 기관’이 아닌 ‘악의 천국’이 된다. 사실, 사회가 허락한 권력들을 믿지 않는 게 상식이 된 세상이다. 그걸 믿는 건 순진한 아이들뿐일 것이다. ‘순진한 믿음을 잃어버린 어른의 상식’이라는 것이 씁쓸하고 아프다. 이처럼 무신뢰 시대의 한국적 자화상은, 곧 ‘프리즌’ 속 세상이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 
 
관련기사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