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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달라진 ‘사무실’…연애 공간에서 '삶의 전쟁터'로

중앙일보 2017.04.10 11:31
"침대 반품은 어렵지만, 나 같은 계약사원 반품은 너무 쉬워요. 고객님 여기서 나가면 저도 회사에서 나가야 될 지 몰라요."
 

드라마 속 로맨스 대신 생존 그린 '오피스물' 잇따라 방송
"젊은 세대들의 사회적 절박함이 높아져 반영"

MBC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은호원(고아성 분)은 침대를 환불해달라며 사무실로 찾아온 진상 고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원은 맨바닥에 무릎까지 꿇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민원을 무마시키고 '생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무실이 어느덧 '정글'과도 같은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흔하디 흔한 '로맨스'는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직급과 상관없이 사무실에서의 고단한 일상이 주 테마로 담기고 있다.
지난달 30일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 남궁민의 열연과 함께 큰 인기를 누렸다.  [사진 KBS]

지난달 30일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 남궁민의 열연과 함께 큰 인기를 누렸다. [사진 KBS]

지난달 30일, 20% 가까운 시청률로 종영한 KBS2 '김과장'은 회사에서 무능력자로 취급받는 경리부 직원들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드라마 속에서 윤하경 대리(남상미 분)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김성룡 과장(남궁민 분)은 자살하려는 상사를 향해 "빌어먹을 회사만 몰라, 우리 오부장님 정말 제대로 잘 살아온 거.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다 아는데!"라고 외친다. 취업 후에도 학자금을 갚아야 하고, 유학 간 딸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기러기 아빠인 이들에게 사무실은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생존의 공간'일 뿐이다. 
 
직장을 배경으로 정글같은 삶의 분투를 그린 2014년 tvN 드라마 '미생'. '오피스 드라마'의 트렌드를 바꾸었다. [사진 tvN]

직장을 배경으로 정글같은 삶의 분투를 그린 2014년 tvN 드라마 '미생'. '오피스 드라마'의 트렌드를 바꾸었다. [사진 tvN]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이 계기였다. 동명 웹툰 원작인 드라마 '미생'은 종합상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현실 속 신입사원들은 자신을 '장그래'에, 중간간부급들은 어려움 속에서 현명하게 팀을 이끄는 '오과장'에 자신을 대입하며 공감했다. 이 과정에서 신파적 요소와 그 흔한 '로맨스'는 없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한국 드라마에는 어떤 장르이든 로맨스로 끝나는 '고질적 병폐'가 있었는데 '미생'의 성공 이후 로맨스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됐다"며 " 다른 이야기 없이 사무실에서 겪은 이야기로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나가도 공감을 일으킬만큼 사회적 절박함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아성(가운데)이 계약직 직원으로 나오는 MBC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 [사진 MBC]

고아성(가운데)이 계약직 직원으로 나오는 MBC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 [사진 MBC]

자연스럽게 여주인공의 '파트너'의 직급도 실장님이나 본부장, 재벌 2세에서 과장, 대리급으로 낮아졌다. '김과장'에서 자주 등장하던 인물은 윤하경 대리와 추남호 부장(김원해 분) 등 동료들이었으며, '자체발광 오피스'에서도 동료 계약 사원들과 부장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 재벌2세급 '대표'들의 모습도 예전과는 다르다.  JTBC 금토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은 여주인공이 회사 대표와 사랑을 이루긴 하지만, 둘 사이의 '갑과 을' 관계를 가볍게나마 담았다. 대표 또한 과거처럼 각 잡고 무게 잡는 인물이 아니라 한없이 가볍고, 재벌 2세임에도 아버지의 대기업을 이끌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회사를 세워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이다.
 
'자체발광 오피스'의 연출을 맡고 있는 정지인 PD는 "여전히 연속극에서는 사무실이 사랑을 통한 인생역전의 공간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즐겨보는 미니시리즈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젊은이들에게 직장은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라 실장님 같은 조력자가 나타나거나 연애를 하게 되면 공감을 못한다. '자체발광 오피스'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되는 현실적 상황을 보여주려 한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특히 최근 오피스물들은 '조직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문제를 꼭 그리고 있다. '미생'은 사회초년생, '김과장'은 경력직 사원, '자체발광 오피스'는 계약직 사원의 적응 문제를 담았다. 그만큼 회사라는 조직이, 로맨스를 꿈꾸기 보다는 눈 앞의 생존을 위해 적응해야 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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