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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돌고 돌아 다시 물

중앙선데이 2017.04.09 00:02 526호 16면 지면보기
김창열의 ‘회귀’(2014), Acrylic, Oil on canvas, 195 x 95 cm

김창열의 ‘회귀’(2014), Acrylic, Oil on canvas, 195 x 95 cm

지난해 9월 24일 개관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관장 김선희)이 첫 기획전을 시작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3월 8일~6월 11일)이다. ‘물방울 작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 화백(88)의 작품 세계와 부드럽게 연결짓는 맥락의 기획이다. 물을 주제로 한 국내외 저명 작가 10명의 작품 19점을 모았다. 지난달 26일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한라산을 품은 나즈막한 미술관엔 이미 봄 기운이 충만했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첫 기획전 가보니

 
정면에서 본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정면에서 본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큐빅 8개가 만든 ‘돌아올 회(回)’
미술관은 제주 서쪽 한림읍 저지(楮旨)문화예술인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박서보 화백과 중국 화가 펑정지에의 작업 공간을 비롯해 TV쇼 진품명품 양의숙 감정위원의 한옥, 제주현대미술관 등이 옹기종기 모여 ‘미술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학교에 지원한 김 화백은 1952년부터 제주시와 애월, 함덕 등지에서 1년 6개월간 부임했던 인연으로 자신의 작품 220점을 제주에 기증하기로 했고, 제주도는 3년에 걸쳐 92억원을 들여 이곳에 미술관을 지었다. 대지 4990평방m(약 1509평)에 연면적은 1587평방m(약 480평) 규모다. 아키플랜의 홍재승 건축가는 김 화백과의 상의 끝에 ‘작은 신전(神展)’을 컨셉트로 잡았다고 밝혔다. 검회색 나무결 무늬가 드러나도록 벽면 콘크리트를 처리해 멀리서 보면 검정 현무암 느낌이 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연못과 분수가 있는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8개의 큐빅이 한자 ‘돌아올 회(回)’자 형상을 만들고 있다. 3개의 전시실과 1개의 수장고, 교육체험실, 카페테리아와 아트숍이 각 큐빅을 채우고 있는 모양새다. 중정으로 나가면 벽면을 따라 위로 올라가도록 돼 있는데, 옥상에 올라가면 다시 땅으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구조를 갖췄다. 카페테리아 앞마당은 작은 공연장으로도 쓸 수 있게 했다.  
 
김창열 화백의 작업 모습. ⓒ김대수

김창열 화백의 작업 모습. ⓒ김대수

아침 햇살에 빛나는 물방울 보고 짜릿
김 화백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호랑이가 살았다는 심심산골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웠고 해방 이후에는 이쾌대 선생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경찰관, 고교 미술교사를 거쳐 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추상회화를 추구하는 앵포르멜 미술운동을 펼쳤던 그는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렸다. 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했고 66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에 정착한 뒤, 72년부터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어떻게 물방울에 천착하게 됐을까.  
 
“파리의 가난한 아틀리에 시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채를 떼어내 다시 쓰기 위해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려 놓았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어요.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습니다.”  
 
90년대에 이르러 캔버스에 쓴 천자문 글씨를 배경으로 물방울을 그려내며 깊은 내공에 이르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색채와 형태의 변화를 시도하며 변신을 꾀한다. 물방울 모양의 큰 유리병에 물을 담고 천장에서 쇠줄로 매달아 늘어뜨리는 설치미술도 시도했다.  
 
마치 진짜 물 위에 떠있는 듯한 사물들  
빌 비올라의 ‘세 여자’(2008), Color High Definition Plasma Display, 9min 6sec

빌 비올라의 ‘세 여자’(2008), Color High Definition Plasma Display, 9min 6sec

이강소의 ‘청명 16131’(2016), Acrylic on canvas, 194 x 259 cm

이강소의 ‘청명 16131’(2016), Acrylic on canvas, 194 x 259 cm

이이남의 ‘박연폭포’(2011), LED TV, 5min

이이남의 ‘박연폭포’(2011), LED TV, 5min

제1전시장은 상설전시장이다. 1957년부터 2013년까지의 주요 작품을 통해 김 화백의 예술세계를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르몽드 신문 위에 알알이 그려낸 물방울 초기작 ‘제13투쟁’(1986)이나 제주 옛 지도 위에 그린 물방울 작품(2003)이 대표적이다. 
 
기획전은 제2, 3전시장에서 펼쳐진다. 전시 제목은 시인 김혜순의 동명의 시에서 따왔다. 시인은 물의 순환성을 노래했다. 하여 시인에게 “이 지상 살다 갔던 800억 사람 몸속을 모두 기억하는” 물은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것이고 또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2전시실로 들어가면 우선 왼쪽에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의 ‘박연폭포’(2011)가 5개의 LED TV 화면을 타고 5분간 흘러내린다.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에 출품됐던 것으로 높이가 8m에 이르는 규모는 관람객을 시각적으로 압도한다.  
 
미디어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의 ‘세 여자’(2008)는 9분 6초짜리 동영상 작품이다. 샤워 커튼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걸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며 물 폭탄을 맞게 되는 엄마와 젊은 두 딸의 모습이 아주 느리게 전개되는데, 엄마와 언니에게 끌려들어 가는 듯한 소녀의 마지막 안타까운 표정이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가장 눈에 띈 것은 한경우 작가의 ‘그린 하우스’(2017)다. 공중에 매단 사물들이 흰 색과 밝은 초록의 대칭적 화면을 통해 마치 물에 잠겨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설치 작업이다.  
 
3전시장으로 가기 직전 복도 바람벽에서는 김창열 화백의 ‘회귀’(2014)가 관람객을 맞는다. 물 흔적을 남기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거대한 물방울을 그렸다. 얼핏 물방울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연상되기도 한다.  
 
3전시장에서는 사진과 비디오 아트를 결합한 임창민 작가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사진을 찍어 놓고 창문 유리창으로 비치는 부분에는 파도치는 바다 동영상을 걸어놓는 식이다.  
 
눈과 비를 맞는 부처의 모습을 담은 백남준의 ‘TV부처’를 비롯, 물 위에 뜬 오리에 천착하는 이강소 작가, 제주 출신 문창배 작가와 부지현 작가, 극지방의 얼음 빙산을 찍은 사진 시리즈를 내놓은 권부문 작가의 작품 역시 흥미로웠다.  
 
한경우의 ‘그린하우스’(2017), 나무·페인트·와이어, 가변크기

한경우의 ‘그린하우스’(2017), 나무·페인트·와이어, 가변크기

임창민의 ‘into a time frame morning in jeju’(2017), Pigment print, LED monitor, 72 x 108 cm

임창민의 ‘into a time frame morning in jeju’(2017), Pigment print, LED monitor, 72 x 108 cm

권부문의 ‘무제’(2007), C-print, 180 x 240 cm

권부문의 ‘무제’(2007), C-print, 180 x 240 cm

“물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싶었다”
전시장 곳곳을 안내해준 김선희 관장(사진)의 목소리는 밝았다. 며칠 전 홍콩 바젤 아트페어에 다녀왔다는 김 관장은 “홍콩의 펄햄 갤러리를 비롯해 김창열 화백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아서 새삼 놀라고 왔다”고 했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작품을 구입해 갔고,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도 기획전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했어요. 아, 그리고 이번 연말에는 프랑스 니스 박물관에서 선생님 개인전을 하기로 최근 확정했습니다.”  
 
김 관장은 이번 전시에 대해 “물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싶었다”면서 “물 한 방울에도 휴머니즘이 결들여지면 그것이 곧 생명”이라고 기획의도를 요약했다.  
 
그는 아트숍에 들어가는 상품 하나도 꼼꼼히 챙긴다. 겉면엔 왁스 코팅 재질로, 내면엔 물방울 그림을 그려넣은 우산이 대표적이다. 태국에서 낡은 어망을 재활용해 만든 지갑은 공정무역을 통해 수입한 것으로 인기가 높다고 했다.  


김 관장은 미술관 문턱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강좌와 모임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희 ‘예술교실’은 3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하는데, 제주 분들은 물론 부산이나 대구 분들도 오셔서 들으실 정도로 관심을 보이고 계셔서 힘이 나지요. 지금 미술관 뒤쪽에 작가를 위한 공간도 만들고 있는데, 완성되면 작가들 교류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
 
 
제주 글·사진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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