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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행복 목욕탕', 나카노 료타 감독&스기사키 하나

중앙일보 2017.04.04 17:52
주인 가즈히로(오다기리 죠)가 말 없이 떠난 후 1년째 휴업 중인 행복 목욕탕. 이곳의 안주인 후타바(미야자와 리에)는 고등학생 딸 아즈미(스기사키 하나)를 살뜰히 보살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후타바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왜 이런 불행이 내게 왔을까’ 원망할 겨를도 없이, 그는 “살 수 있는 날까지 삶의 의미를 저버리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한 사람의 죽음 뒤 새로운 가족이 남겨지는 이야기. 
 
‘행복 목욕탕’(원제 湯を沸かすほどの熱い愛, 3월 23일 개봉)은 삶과 죽음의 경계, 과거와 현재, 가족의 의미를 두루 어루만지는 뭉클한 드라마다. 미야자와 리에, 오다기리 죠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감동을 더한다. 독립 장편영화 ‘캡처링 대디’(2013)로 주목받은 신인 감독 나카노 료타(43)의 상업영화 데뷔작이자, 제40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한국 개봉에 맞춰 내한한 나카노 감독과 아즈미 역을 연기한 스기사키 하나(19)를 만났다.  
스기사키 하나-나카노 료타 감독(사진=라희찬 STUDIO 706)

스기사키 하나-나카노 료타 감독(사진=라희찬 STUDIO 706)

삼촌-조카 사이 같기도 하고, 아빠와 딸 같아 보이기도 한다. 질문을 경청하고 차분히 말을 이어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퍽 닮은 듯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나카노 감독은 “처음부터 아즈미 역에 스기사키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했다. 서로에 대한 두터운 신뢰 때문일까. 스기사키는 1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깊이 있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 줬다. ‘행복 목욕탕’의 시작이 궁금해졌다.
 
‘캡처링 대디’에 이어 이번에도 가족영화다. 이번엔 ‘사라져 가는 전통 목욕탕’이라는 소재를 가미했는데.
 
나카노 료타 감독(이하 나카노 감독)

“지금의 가족 모습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어머니와 아버지, 아이들로 구성된 전통적 가족 형태는 이미 무너졌다. 그럼 이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 같이 사는 사람이 가족일까, 피를 나눠야만 가족일까. 이런 생각 끝에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가족의 초상을 그리려 했다.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전통적인 대중목욕탕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대중목욕탕은) 상당히 재미있는 공간이지 않나. 모르는 사람끼리 탕 속에서 담소도 나누고. 소통이 사라져 가는 지금, 이런 정겨운 곳을 무대로 현대적인 가족상을 그려 보고 싶었다. 요즘은 일본의 대중목욕탕도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개조한 곳이 많은데, 일부러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목욕탕을 찾아 촬영했다.”

 
-후타바의 병을 계기로, 아즈미는 물론이고 집 나갔던 남편 가즈히로와 그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딸 아유코(이토 아오이)까지, 모두가 함께 살며 다시 목욕탕 문을 연다. 이런 과정은 모두 후타바의 따뜻하고 강인한 성품에서 비롯된다. 그가 아주 특별한 여성으로 느껴지던데.
 
나카노 감독 

“미야자와 리에와 긴 시간 상의하며, 후타바를 평범한 어머니로 그리기로 했다. 가족 앞에선 강한 모습만 보이지만, 내면엔 상처도 많고 약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보이려 노력했는데(웃음). 극 중 후타바는 딱 한 번 ‘죽기 싫다’며 흐느끼는데, 그게 그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엄마를 상징하는 존재랄까. 후타바 역시 친어머니를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연을 맺은 이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가족을 향한 그의 끝없는 사랑은 여기서 나온다고 봤다.”

사진=영화사

사진=영화사

 
-아즈미와 후타바는 각별한 모녀(母女)다. 극 중 두 배우가 진짜 가족처럼 다정하고도 현실적으로 보였다.

 
스기사키 하나(이하 스기사키) 

“모두 나카노 감독님 덕분이다. 촬영 전부터 오랫동안 미야자와씨와 진짜 엄마와 딸 같은 사이가 되도록 도와주셨다. 이를테면 매일 문자 메시지 보내기, 서로 존댓말 하지 않기 등 많은 숙제를 내셨다(웃음). 그러다 보니 촬영할 땐 내가 연기하는 중이란 걸 잊어버릴 정도로 아즈미가 된 것 같았다. 아즈미가 엄마를 대할 때와 아빠나 아유코를 대할 때의 모습이 조금 달라 보이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가즈히로는 ‘이토록 무책임한 인간이 있나’ 싶은 남자지만 결코 밉지는 않더라. 오다기리 죠라는 배우의 힘이 큰 것 같은데.
 
나카노 감독 

“맞다(웃음). 오다기리와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즈히로는 가장으로선 정말 대책 없지만,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그리자’고 했다. 사실 그가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건,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다. 단 한 번 만난 여자가 ‘당신의 아이를 낳고 길렀다’는 말에 집을 훌쩍 떠나는 사람이니 말이다. 오다기리는 아주 자유롭게 연기하는 독특한 배우다. 촬영 당일 (촬영 내용에 대해)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찍으면 됐기에 연출이 따로 필요 없었다(웃음).”

 
스기사키 

“5년 전 TV 드라마 ‘가족의 노래’(후지TV)에서 오다기리씨와 부녀(父女)로 출연한 적 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고, 그와 함께 촬영할 때면 마음이 더 편했다. 생각해 보니, 5년 전엔 그와 촬영하는 게 긴장돼 잠도 못 잤던 것 같네(웃음).”

 
미야자와 같은 관록 있는 배우부터 어린이 배우 이토 아오이까지 모두 빼어난 연기를 펼쳤다. 연기 연출의 비결이 있다면.
 
나카노 감독 

“감독은 ‘배우의 잠재력을 잘 끌어낼 자리를 만드는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건, 촬영 전 배우들을 잘 이어 주고 ‘촬영 현장에서 (연기를) 보여 주세요’ 하는 정도 같다. 그들이 본래 가진 힘을 잘 빌려 쓰는 거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시나리오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배우가 인물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본을 쓰는 것, 이 영화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다.”

 
스기사키 

“아즈미 역을 연기하는 동안 나카노 감독님이 나를 깊게 믿어 주셨다. 중요한 장면을 연기할 때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때마다 나카노 감독님은 ‘(스기사키) 하나는 잘할 수 있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뿐 아니라 촬영 현장의 많은 스태프와 배우가 신뢰와 애정을 느낀 것 같다. 내가 받은 마음 이상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넘쳤던 멋진 현장이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나카노 감독님이 집중하면 콧바람을 엄청 세게 낸다.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웃음).”

 
극 중 아즈미가 엄마의 손수건을 챙기는 모습, 식구들이 함께 샤부샤부를 먹는 모습 등 일상적인 설정이 이 영화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었는데.
 
나카노 감독 

“영화는 디테일을 쌓아 올려 큰 감정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극 중 이런 요소는 대체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은 결과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귀엽고 따뜻한 소품을 좋아해 많이 신경 썼다.”

사진=영화사

사진=영화사

 
지난해 10월 일본 개봉 당시 20개 상영관에서 장기 상영(22주차)할 정도로 일본 관객에게 사랑받았다고 들었다. 이런 반응을 통해 일본 사회의 분위기 변화를 읽을 수 있을까.
 
나카노 감독 

"일본에서 ‘행복 목욕탕’과 같은 시기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이 세상의 한쪽 구석에’(원제 この世界の片隅に,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 역시 크게 사랑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로시마가 배경인데, 이 작품 역시 따뜻함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을 그렸다. 이를 보며 지금 일본 사람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情)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행복 목욕탕’을 만들며 깨닫게 된 점이 있다면.
 
스기사키 

“연기하며, 또 완성된 영화를 보며 엄마를 향한 애정을 다시금 느꼈다. 그와 동시에 피를 나눈 부모나 형제가 아닌 이들과도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미야자와씨와 자주 만나고 연락하며 지낸다. ‘행복 목욕탕’은 영화를 넘어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준 고마운 작품이다.”

 
나카노 감독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이 편지를 보내 주셨는데, 대체로 후타바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이었다. 한 분은 ‘나도 후타바처럼, 남은 삶에 제대로 맞서며 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런 마음을 나누는 게 바로 내가 영화를 찍는 의미라는 걸 절실히 느끼며,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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