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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82년생 김지영들이 사는 세상

중앙일보 2017.04.04 03:35 종합 28면 지면보기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각종 통계와 분석기사를 인용하면서 보편적인 한국 여성의 생애사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편적인 수준 이상으로 운이 좋은 여성이다. 중산층이고 평균 이상으로 배려심 있는 남편과 살고 있으며 평균 이상으로 이해심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랐고 평균 이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했다. 이 소설의 가장 무시무시한 순간들은 치한, 갑질하는 거래처 부장 등 종종 맞닥뜨리는 평균 이하의 못된 인간들과의 조우가 아니다.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주변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들이다.
 
김지영씨를 계속 괴롭히는 짝꿍을 따끔하게 혼내준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짝을 바꿔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구는 거라며 웃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넘긴 할아버지 택시기사님은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면접 가는 것 같아 태워 준 거라고 말한다. 여직원들의 화장실 몰카 사진을 성인 사이트에서 발견하고는 자기들끼리 돌려 본 남자 직원들을 경찰에 신고한 여성에게, 평소 감각도 생각도 젊던 대표는 업계에 알려지면 회사는 어쩌라는 거냐, 가정 있는 남자들 인생을 망쳐야 속이 시원하냐고 타박한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편한 시댁, 시어머니는 며느리 김지영씨와 함께 종일 정성스레 명절 음식을 만들어 친정 오자마자 뻗어버린 시누이에게 먹인다. 김지영씨가 깎는 배를 먹으며 고생스럽게 음식 만들지 말고 사다 먹자는 시누이에게 시어머니는 자기 가족 먹이려고 음식하는 게 뭐가 고생이냐고 묻는다. 평균 이상으로 배려심 많고 다정한 남편은 출산과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김지영씨에게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는 걸 생각해 보라며 말한다. “내가 많이 도와줄게.”
 
예외가 아니라 평균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가 사회를 규정한다. 덴마크·노르웨이라고 성범죄가 없겠으며 가정폭력이 없겠는가. 그 사회의 평균과 상식이 앞서 있기에 부러워하는 것이다. 악의 없이 준 상처라는 말은 변명이 못된다. 세상의 죄 대부분은 악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다. 더불어 살려면 타인의 입장을 알 의무가 있다. 옛날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는데 배부른 소리라는 말을 들으면 반문하게 된다. 아니 원시시대보다 훨씬 안락한데 토굴에 살지 집은 왜 구하시나. 예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매순간 현재를 산다. 평등을 넘어 역차별 시대라고 소리 높이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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