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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공약과 현실 사이에서 길 잃은 트럼프케어

중앙일보 2017.04.04 03:28 종합 30면 지면보기
채병건워싱턴 특파원

채병건워싱턴 특파원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난해 미국 대선후보 경선의 두 번째 분수령이던 뉴햄프셔주 경선을 하루 앞둔 2월 8일 밤 9시쯤이었다.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의 한 유세장에 도착했던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연단에 올라 “오바마케어는 반드시 없애고 대체하겠다”고 외쳤다. 5000여 명의 지지자는 함성을 질렀다. 이날 유세장을 메운 이들은 청바지에 야구 모자 차림의 평범한 백인들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백인 청년 바비 마코프는 “트럼프는 미국을 진심으로 위한다”며 “정치나 기업이나 제약사, 로비스트에게 휘둘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후보는 제약사의 횡포와 이들을 대변하는 로비스트의 장난질 때문에 오바마케어(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제도)는 망했고 삶이 고달픈 서민들이 엄청난 보험료를 내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테드 크루즈에게 일격을 당했던 트럼프는 뉴햄프셔에서 선두를 되찾으며 위기를 탈출했다.
 
대선 기간 중 트럼프 후보가 내내 강조했던 게 오바마케어 폐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은 공수표가 됐다. 백악관이 오바마케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트럼프케어(미국건강보험법안)는 하원 표결에 올리지도 못하고 무산됐다. 직접적인 이유는 공화당 내 보수 강경파 의원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가 트럼프케어에 반대해 하원 내 법안 통과를 위한 마지노선인 216표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결 정족수 미달은 본질이 아니다. 트럼프케어는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두 가지 목표를 하나에 담으면서 벌어진 입법 참사였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었던 원래의 약속은 사실상 보편적 복지였다. 보험료는 줄이면서 보험 혜택은 늘린다는 구호였다. 지난 1월 25일 트럼프 대통령은 방송 인터뷰에서 “오바마케어는 너무 비싸다”며 “보험 적용을 받아야 할 분야가 보험 적용이 되고 있지 않다. 이건 재앙”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더 적은 돈으로 더 좋은 보험”을 약속했다. 이러려면 정부 재정의 추가 투입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철학은 관(官)의 개입을 가능한 한 줄이는 작은 정부다. 무엇보다 트럼프 정부는 재정적자 축소를 약속했다. 보험 혜택은 늘리면서 재정적자를 줄이는 묘안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표와 돈 사이에서 트럼프케어는 해법 아닌 해법을 냈다. 예컨대 극빈층 대상 건강보험인 메디케이드의 확대를 금지하는 시기를 2020년으로 늦춰놨다. 그전에 중간선거를 치르는데 트럼프케어를 당장 도입하면 지지층인 백인 저소득층의 표가 이탈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민주당은 오바마케어의 개악으로 반대했고, 공화당 내 극보수는 오바마케어의 잔재가 남아 있는 아류라고 비난했다.
 
트럼프케어는 대선 공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더 많은 혜택’을 내걸었지만 이를 현실화할 재정과 정치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식물 대통령으로 조기에 몰릴 수도 있다는 반면교사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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