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트렌드] 65세부터 필요한 의료비 예상 ‘500만원 - 8100만원'

중앙일보 2017.04.04 00:02 라이프트렌드 7면 지면보기

노후 의료비 대책 절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장수를 최고의 복(福)으로 여겼다. 하지만 고령사회를 눈앞에 둔 지금,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기대수명은 80세가 넘는데 건강수명은 65세로 은퇴 이후 15~20년 동안을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려야 한다.

의료비 또한 만만치 않다. 장수를 예상하지 못한 80~90대 부모와 그들의 자녀인 1955~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이 ‘의료 파산’이라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민들은 노후의료비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지난달 30일 서울 강동구의 한 고시원. 좁은 방 안에 앉아 있던 박무연(70·가명) 할아버지는 “성실하게 살았는데 이런 신세가 될 줄 몰랐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다리를 구부리지 못했다. 발바닥은 통풍으로 부어 있었다.

1980년대 그는 늠름한 역무원이었다. 당시 도시개발 붐이 일자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섬유공장을 차려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사업이 부도나면서 가계가 급격히 기울었다. 가족도 그의 곁을 떠났다. 몸부림쳤지만 회생의 기회는 보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결국 온몸에 병이 깃들었다. 통풍과 고혈압, 당뇨, 녹내장까지 합병증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는 생활이 어려워 병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암 진단받고 대다수 일 그만둬
“집안에 암환자가 생기면 완치를 위해 애쓰는 중에 가계 경제가 무너지고 맙니다. 치료하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중단해야 하니 속상할 따름입니다.” 3년째 암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임수정(65·여·가명)씨의 말이다. 임씨는 5년 전 은퇴하자마다 암이 생겼다. 치료에 매진했지만 3년 뒤 암이 재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병생활을 중단했다. 암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 데다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아픈 노년층이 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의 부모들이 90세를 넘어서면서 노후 파산이 현실화하고 있다. 장수를 예상하지 못한 데다 연금이나 의료비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65세 이상 노인의 1인당 연간 진료비는 2010년 284만원에서 2014년 333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2014년 발표된 노인실태보고서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중 89.2%가 만성질환을 갖고 있고, 이들은 평균 2.6개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이 중 암은 한국인의 사망원인 중 부동의 1위다. 치료기술 발달로 암 생존율은 향상됐지만 문제는 막대한 치료비다.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암환자 1인당 치료 비용은 간암 6622만원, 췌장암 6371만원, 폐암 4657만원에 이른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 중 83.5%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 결국 소득이 줄고 의료비 지출이 많아지는 노년기에 ‘노후 파산’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국민들의 노후의료비에 대한 인식과 준비 수준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65세 이후에 필요한 평생 의료비가 500만원 미만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지난해 8월 서울과 5개 광역시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20~69세 국민 1552명을 조사한 ‘행복수명지표’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3.3%가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2016년 진료비통계지표’(건강보험심사평가원)와 ‘2015년 생명표’(통계청)를 바탕으로 분석한 65세 이상에게 예상되는 노후의료비는 8100만원이다. 무려 16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전체 응답자의 평균 노후의료비인 2538만원과 비교해도 3배 이상 차이를 보였다.

특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기대수명이 길어 노후의료비 부담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위원회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여성 1인당 필요한 노후진료비는 9090만원이었지만 국민들의 예상액은 2269만원으로 4배 차이가 났다.

노후의료비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11년보다 남성은 36.8%, 여성은 32.9% 증가했다. 노후의료비는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고, 치료비도 급증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인식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수창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은 “노후의료비가 노후 빈곤을 심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공적 사회안전망이 취약해 앞으로 노후의료비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험 가입자 절반이 소액 보장

노후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보험 가입 같은 대비책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준비도 부족하다. 행복수명지표에 따르면 응답자의 26.0%는 보험에 하나도 가입하지 않았다. 보험에 가입한 응답자의 절반(50.8%) 이상은 500만원 미만의 소액이었다. 결국 암이나 심·뇌혈관질환 등 큰 질병에 걸리면 노후 파산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최현자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행복수명지표와 통계자료를 분석한 결과 노후의료비에 대한 인식과 준비 수준이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노년에는 소득은 감소하고 각종 질병으로 의료비 지출이 증가하기 때문에 연금 같은 노후생활비 외에도 별도의 대책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태우 기자 kang.taewoo@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