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직도 세상엔 ‘여자’와 ‘남자’만 있다구요?

중앙일보 2017.04.01 10:00
당신이 심심할 때마다 들여다보는 페이스북 얘기로 시작하자.  
 

여성과 남성을 넘어 다양한 성 정체성 선택하는 젊은층
미 페이스북은 성별 옵션 60개, 패션업계에선 '젠더프리'가 화두
점점 무너지는 젠더 장벽, 주요 사회 시스템에도 영향 미칠 것

전세계에서 10억 명 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접속하는 이 거대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사용자가 프로필에 자신의 성별 혹은 성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무려 60개란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여성’ 혹은 ‘남성’이 아닌 다른 선택권이 58개나 된다는 걸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동성애자 여성, 동성애자 남성, 양성애자, 무성애자, 남성에겐 여성, 여성에겐 남성, 정확하지 않은 남성, 정확하지 않은 여성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버겁다. 타임지가 3월 27일자로 발간한 잡지에 ‘젠더에 대한 관념이 바뀌고 있다’는 기사를 특집으로 다루며 든 예시다.  
 
타임지는 자신의 성별과 성 정체성을 각각의 방식으로 정의한 10대와 20대를 인터뷰해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한 인간의 성별과 성 정체성은 살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입을 모았다. [타임지 캡처]

타임지는 자신의 성별과 성 정체성을 각각의 방식으로 정의한 10대와 20대를 인터뷰해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한 인간의 성별과 성 정체성은 살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입을 모았다. [타임지 캡처]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이 더이상 의미 없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까.  
 
잡지는 “최근 미국에선 자신의 성별과 성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 단순히 ‘여성’과 ‘남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가 증가하고 있다”며 “전통적인 이분법을 떠나 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해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만 제공하는 것이긴 하지만, 3년 전부터 다양한 성별과 성 정체성 옵션을 서비스해온 페이스북은 이런 트렌드를 일찌감치 짚어낸 대표적인 사례다.  
 
흥미로운 건 이런 특징이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ㆍ미국에서 1982~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로 개인적이며 SNS에 익숙함)라 불리는 젊은층에서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타임지는 “한 성소수자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 중 20%는 전통적 구분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의했다”고 보도했다.   
 
젊은 세대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하나에 가두지 않고, 또 이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페이스북ㆍ인스타그램 등 SNS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타임지의 분석이다. 
 “SNS가 일상인 젊은이들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일찌감치 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할리우드 톱스타 등 셀레브리티의 용기 있는 커밍아웃도 영향을 끼쳤다.  
 
 유행에 민감한 기업들이 이런 변화를 놓칠 리 없다.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건 패션 업계다. 
 지난해 패션계의 키워드는 주어진 성에서 자유롭다는 뜻의 ‘젠더프리(genderfree)’와 ‘젠더리스(genderless)’였다. 
 세계적 스파 브랜드 자라는 남녀 공용 라인을 출시하며 ‘언젠더드(Ungenderedㆍ성 구분없이)’란 이름을 붙였고, 구찌는 레이스 블라우스와 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모델을 런웨이에 세웠다.  1970년대 유행한 ‘유니섹스’(남녀 공용ㆍ주로 여성이 남성복을 입었던 것을 지칭) 스타일을 넘어 아예 젠더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젠더 개념을 초월한 패션이 2016년을 휩쓴 것이다.  
 
성별의 벽을 허무는 ‘젠더리스’ 패션. 지난해 패션계의 화두였다. [FFT 캡처]아래는 구찌 패션쇼 영상. 럭셔리 브랜드 구찌는 ‘젠더리스 패션’을 선도해 온 대표적인 업체다. 

젠더의 벽을 허무는 ‘젠더리스’ 패션. 지난해 패션계의 화두였다. [FFT 캡처]아래는 구찌 패션쇼 영상.럭셔리 브랜드 구찌는 ‘젠더리스 패션’을 선도해 온 대표적인 업체다.

 
 
 
 그뿐 아니다. 
 미국 맛집 공유 어플 ‘옐프(Yelp)’는 얼마 전 성전환자가 이용하기 편하도록 ‘성중립 화장실 필터’ 기능을 추가했다. 
 뉴욕타임스는 6일(현지시간) “이 기능을 사용하면 여성과 남성으로 딱히 구분하지 않은 성중립 화장실이 있는 식당을 간편하게 찾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시대를 앞서는 발상으로 유명한 미국의 맥주 회사 버드라이트는 최근 “모든 성을 위한 맥주”를 카피로 내세운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더디긴 하지만 사회 시스템도 이런 변화에 조금씩 발맞춰가는 모양새다.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 결혼 합법 판결 이후,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장치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운전 면허증과 같은 신분증의 젠더 선택란에 세 번째 옵션을 추가했다. 
 새로운 선택지의 명칭은? ‘남성이나 여성에 속하지 않는(non-binary)’이었다.  
 
지난 10일에는 오리건주 지방법원에서 사상 처음으로 ‘무성’(無性ㆍagender)’을 법적 성별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말 그대로 ‘성별이 없는’ 정체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판결을 두고 “조용하게 역사가 만들어졌다”(미국 NBC)는 평가가 나왔다.  
 
 물론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성소수자의 인권 또한 아직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 
 타임지는 “성소수자 청소년의 3분의 1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많은 이들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 특히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 그렇다”며 “젠더에 대한 관념을 두고 벌어지는 세대 간 갈등도 문제”라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후퇴시킬 거란 우려 또한 현실이 되고 있다. 
 미국 정치 전문 매체 더힐은 22일 “트럼프 행정부가 ‘성전환 학생들의 학교 내 화장실 권리보호 지침’을 철폐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5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내 모든 공립학교에 ‘성전환 학생이 자신이 선택한 성 정체성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할수 있도록 조치 하라’고 내린 지침에 철퇴를 내린 것이다.  
 
캐나다 감독 자비에 돌란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의 한 장면. 여성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어느 날 “여자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돌란 감독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것은 물론,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만들며 주목받았다. 지난해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선 ‘단지 세상의 끝’으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기도 했다. 

캐나다 감독 자비에 돌란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의 한 장면. 여성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어느 날 “여자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돌란 감독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것은 물론,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만들며 주목받았다. 지난해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선 ‘단지 세상의 끝’으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도 이런 거대한 흐름을 막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타임지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젠더의 장벽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며 “이는 페이스북뿐 아니라 법원이나 군대처럼 주요한 사회 시스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SNS 이용도 활발하고, 전통적 의미의 ‘짝’을 만나는 대신 ‘나 혼자 산다’는 싱글족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한국은 어떨까. 
 미디어에서 동성애가 여전히 개그 코드로 소비되고, 싱글족을 좇는 카메라가 ‘빨리 짝을 만나야지’라는 결론으로만 귀결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논의는 너무 이른 것일까.  
 
참고로 페이스북은 한국에서 젠더 옵션을 세 가지만 제공하고 있다. 여성, 남성 그리고 사용자 지정란. 


그나마 다행인 건, 사용자 지정란에는 뭐든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단 사실이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