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굿바이 애플, 우리는 따로 갈게

중앙일보 2017.03.31 18:00
애플 제품을 대신 생산하는 기업이 있습니다. 미국업체? 중국업체? 아닙니다. 언론에서 한 번쯤 들어보셨을 그 이름은 바로 대만 폭스콘입니다. 이 기업은 연간 매출액 기준으로 대만 최대 기업입니다. 세계 최대 EMS(전자제품 위탁생산 서비스) 기업이기도 하지요.
 

해운업에서 IT로 전향. 세계 최대 EMS 기업
脫 아이폰, 제2의 도약 준비

이 회사의 실적은 놀랍습니다. 2015년 매출이 1405억 달러(165조원)를 기록했는데 이는 같은 해 대만 경제총생산(GDP)의 27%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그만큼 폭스콘은 대만에서 위상이 높습니다.  
 
‘폭스콘’이라는 이름은 대만 ‘훙하이정밀공업’의 중국 자회사 ‘富士康(Foxconn)’에서 따왔습니다. 중국어권에서는 훙하이(Hon Hai, 鴻海)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중국 광둥성 선전의 폭스콘 공장 노동자들이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출처: 중앙포토]

중국 광둥성 선전의 폭스콘 공장 노동자들이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출처: 중앙포토]

 
훙하이는 기러기를 뜻하는 훙(鴻, 기러기 홍)과 바다를 가리키는 하이(海)를 합친 것입니다. ‘홍비천리 해납백천(鴻飛千里 海納百川, 기러기는 천 리를 날고 바다는 백 개의 강에서 물을 받아들인다)’이라는 중국 송나라 사서인 통감절요에서 따왔습니다. 기업 이름에서부터 거대한 야망을 담은 것이지요.
 
폭스콘은 1974년 설립되어 미국과 중국에 연구개발(R&D)센터를 두고 있습니다. 세계 200곳에 거점을 두고 직원수만 106만 명이 넘습니다.
폭스콘 본사. 1974년 첫 설립됐으며 타이베이시에 위치해 있다. 2014년 기준으로 106만명의 직원을 세계적으로 두고 있다. [출처: 폭스콘 홈페이지]

폭스콘 본사. 1974년 첫 설립됐으며 타이베이시에 위치해 있다. 2014년 기준으로 106만명의 직원을 세계적으로 두고 있다. [출처: 폭스콘 홈페이지]

 
폭스콘을 설명하자면 이 회사 창업주인 궈타이밍 회장을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작은 고무공장을 굴지의 제조업체로 키운 기업가이자 카리스마 경영자인 그는 때로는 ‘독재자’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사안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속전속결 스타일이지요. 포브스지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1억 달러(약 7조원)로 대만 4위의 부호입니다.
 
해운업에서 IT로...냉정한 경영자, 차가운 승부사 궈타이밍
폭스콘의 역사는 궈 회장의 일생과 마찬가지입니다.  
 
궈타이밍은 1950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만 사회에서는 ‘산시성에 뿌리를 둔 외성인(外省人)’으로 분류됩니다. 외성인은 원래 대만 출신이 아니고 1949년 국민당에 본토에서 근거지를 대만으로 옮길 때 함께 이주한 본토 출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실향민인 셈이죠.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궈 회장이 해운업체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대만 타이베이시에 있는 중국해사전과학교(현재는 대만해양기술학원)를 졸업했습니다.  
 
대만에도 병역의 의무가 있는데요, 궈 회장은 병역의 의무를 마친 뒤에 해운회사에 입사해 운송 상품에 적합한 선박을 찾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 뒤 무역회사로 옮겨 일하게 됐는데, 그러면서 상품을 주고받는 무역의 기본이 되는 ‘상품’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궈타이밍 [출처: 바이두]

궈타이밍 [출처: 바이두]

 
 
24살 때 궈타이밍은 회사원 생활을 접고 자기가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빌린 10만 대만달러(355만원)를 밑천으로 고무공장을 세웠습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쌀조차 맘 편하게 살 돈이 없어서 처가에 손을 벌리는 시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외곽 도시였던 신베이시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도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원이 10명밖에 안 되던 이 회사는 폭스콘의 전신인 폭스콘 플라스틱기업유한공사였습니다.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고 가공하는 업체였지요. 그는 이후 회사명을 폭스콘 정밀공업으로 고친 뒤에 흑백TV와 컴퓨터 부품을 생산하며 회사를 키웠습니다. 이 회사는 40년 뒤 106만명의 직원을 둔 회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0년, 폭스콘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미국 게임 회사인 아타리로부터 게임용 콘솔에 들어가는 조이스틱과 게임기를 연결하는 부품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나스닥 상장회사인 아타리는 영화 ‘픽셀’에도 등장하는 전설적인 게임 기업이며 핀볼게임기와 가정용 게임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타리와 손을 잡으면서 폭스콘의 미래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휴대용 소형 전자게임기 등을 만들면서 수출이 살 길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궈 회장은 낯선 미국에 무턱대고 찾아가 고객들에게 매달렸습니다. 궈 회장은 싼 모텔에 묵으며 미국 32개주를 직접 발로 뛰었습니다. 덕분에 1985년 미국 컴팩컴퓨터에서 대량 수주를 따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공격적인 영업활동을 펼친 끝에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컴팩은 폭스콘에 데스크톱 PC 금속 케이스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궈 회장에게 그 주문은 사실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폭스콘은 금속 케이스 제조에 필요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겁니다. 금속 케이스를 만들려고 일본에서 비싼 공작기계도 사들였는데 컴팩의 주문량에 비해서는 기계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기까지 했습니다. 많이 만들어서 납품한다 한들,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던 거죠.  
 
궈 회장은 이 때, 전혀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생각해냅니다. 하드 디스크 장치(HDD) 등 고가의 부품을 빼고 메인보드와 케이스 등 기본 부품이 달려 있는 반(半)조립 PC를 생산해 컴팩에 납품해버린 겁니다. 요리로 따지면 데우거나 약간만 조리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컴팩으로서야 반길만한 일이었죠. 폭스콘이 제공하는 패키지 상품 하나만 사면 되기 때문에 편리해진 겁니다.  
 
PC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컴팩 쇼크’라고까지 일컬었습니다. 폭스콘이 반조립 PC를 만들면서 제품가격은 크게 내려갔습니다. 그 때까지 시장을 독점하던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도 곧 무너져내렸습니다. 사실 이렇게 업계에 파란을 일으키기까지 폭스콘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기술력을 위해선 자존심도 굽혔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경쟁사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기술 전수를 부탁한 적도 있었다고 하네요.  
 
이렇게 실력을 기른 폭스콘은 마침내 애플의 구세주가 됩니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인 2002년, 애플은 ‘파워맥 G5’ 합금 케이스를 만들어주는 업체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폭스콘이 등장해 애플이 원하는 대로 부품을 만들어서 납품했습니다. 애플은 폭스콘의 단골 고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둥근 모서리 아이폰 시리즈 등 애플의 대작도 전부 폭스콘의 작품이었습니다.
애플 CEO 팀 쿡(왼쪽)이 폭스콘에서 애플폰을 보고 있다. [출처: 커지쉰(科技?)]

애플 CEO 팀 쿡(왼쪽)이 폭스콘에서 애플폰을 보고 있다. [출처: 커지쉰(科技?)]

 
미국 전자·IT기업인 HP, IBM까지 폭스콘을 전자제품 제조공장으로 지정하기에 이릅니다. 폭스콘은 이제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전자 및 IT업체의 상품을 주문자 제조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킨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X박스원도 폭스콘이 주문을 받아 위탁생산중입니다.  
 
1988년 중국 본토 광둥성 선전에 공장을 지으면서 폭스콘은 본격적으로 성장합니다. 홍콩의 맞은편에 위치한 선전은 중국 경제 발전의 상징적인 곳입니다.  
 
지금이야 대만 기업의 중국 진출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한국 기업이 개성공단에 진출한 것과 비견될 정도로 리스크를 안고 시작한 사업이었습니다. 궈 회장은 중국에 통 큰 투자를 했습니다.  
 
생산시설만 건설한 게 아니라 엄청난 숫자의 종업원이 생활할 수 있도록 기숙사형 생산단지를 지었습니다. 숙소, 식당, 진료소는 물론이고 직원들의 식탁에 달걀을 공급할 수 있게 양계장까지 함께 지었습니다. 직원용 풀장과 자체 소방대까지 있습니다. 아예 폭스콘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는 크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시내 중심부에 식품점·은행·서점에 폭스콘 TV라는 이름의 자체 TV방송국도 운영했습니다. 물론 항상 폭스콘이 칭찬만 받았던 건 아닙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끝에 폭스콘에서 직원들이 연이어 자살하면서 문제가 커지자, 궈 회장이 진화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애플에 좌지우지되는 실적에...폭스콘 제2의 도약 준비
사실 폭스콘은 최근 십여 년간은 잘 나가던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연간 매출액에서 애플에 좌우되는 비중이 40%~50%에 이를 정도로 수익원이 편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애플의 실적에 따라 흥망이 좌우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실제로 2016년 대만 폭스콘의 매출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해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16년 폭스콘 매출은 1363억8000만 달러(161조원)로 소폭이지만 2015년보다 줄었습니다. 1991년 회사 상장 이후 처음 벌어진 일입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아예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폭스콘의 부진은 애플의 아이폰 판매량이 감소한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폭스콘이 단순제조 단계를 벗어나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선 폭스콘은 바이오 분야에 도전했습니다. 2009년 대만의 제대혈 은행 바이오넷(Bionet)과 공동으로 출자해 건강검진센터 헬스콘(Healthconn)을 설립했습니다. 2014년에 대만대학 내 바이오메디컬 공학센터를 개설한데 이어 2018년에는 폭스콘이 주도해 암센터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바이오 분야는 진입 문턱이 높기 때문에 경쟁자도 상대적으로 적고 바이오분야 기계들은 제품의 수익률도 높아 폭스콘에는 유리합니다.
 
궈 회장은 전기자동차 사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중국 자동차 업체인 하모니 오토, 중국판 다음카카오에 해당하는 텐센트와 함께 ‘인터넷플러스(+) 스마트카’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하고 힘을 모아 ‘퓨처 모빌리티(Future Mobility)’라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2020년에 첫 제품(스마트카)를 선보이기로 했습니다. 이밖에 폭스콘은 중국 정저우와 항저우에 전기차 렌탈서비스 업체를 설립해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2016년 3월에는 일본 가상현실(VR) 헤드셋 업체인 포브(Fove)사에 투자해서 VR 헤드셋을 수탁 생산하는 형태로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가장 컸던 사건은 2016년 일본 굴지의 업체 샤프와 인수계약을 체결(샤프 지분 66% 취득)한 것입니다. 샤프의 브랜드 파워와 고급 기술(OLED 등)을 동시에 취득하게 된 것이죠. 폭스콘은 로봇 사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2016년 5월 로봇 분야에 정통한 대만대학 전기·정보공학과 교수를 이사진으로 영입한데 이어 일본에서 만든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를 대만에 출시하기 위해 로봇사업 계열사(판매·서비스법인)를 설립했습니다. 대만 내 은행, 대형마트, 지자체 청사 등지에서 페퍼가 본격 투입될 예정입니다.
소프트뱅크에서 만든 로봇 페퍼를 대만에 보급하는 일을 폭스콘이 맡았다. [출처: 소프트뱅크]

소프트뱅크에서 만든 로봇 페퍼를 대만에 보급하는 일을 폭스콘이 맡았다. [출처: 소프트뱅크]

 
 
2016년 5월에는 HMD글로벌(핀란드 기업)과 공동출자해서 노키아 피처폰 사업을 인수했습니다. 폭스콘이 디자인·생산·애프터서비스(A/S)를 책임지는 구조입니다. 폭스콘으로서는 자신들의 주요 고객사인 애플과 충돌을 피하고 신흥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지요. 가트너에 따르면 전 세계 휴대폰 판매량은 19억 대 정도 되는데 아직까지 피처폰은 3억~4억 대가 팔릴 예정입니다. 스마트폰이 대세이긴 하지만 피처폰의 여지도 남아 있다는 얘기지요.
 
아내가 죽은 뒤...내 삶이 달라졌다. 일벌레에서 자선사업 나서는 경영자로 
발레 무용가 정신잉(왼쪽)과 결혼식을 올린 궈타이밍 [출처: 차이나포스트]

발레 무용가 정신잉(왼쪽)과 결혼식을 올린 궈타이밍 [출처: 차이나포스트]

 
경영자로서의 궈타이밍 회장은 승부사이자 냉철한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그는 폭스콘을 이끌어오면서 ‘냉정한 경영자’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 번째 부인 정신잉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과 함께 한 궈타이밍 회장. [출처: 빈과일보]

두 번째 부인 정신잉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과 함께 한 궈타이밍 회장. [출처: 빈과일보]

 
한창 일에 빠져 있을 때 그는 하루 16시간을 일하고 삼시세끼를 책상에서 해결하는 일 중독자였습니다. 지독한 일벌레인 것은 물론이었고요. 간부들을 자정이 넘은 시간에 불러 보고를 하게 한다든지, 회의를 연다는지 하는 일은 밥 먹듯 이뤄졌습니다. ‘거친 경영인’이라는 수식어도 그래서 나왔죠. 여기에 폭스콘의 주요 공장인 선전에서 직원들이 연이어 자살하면서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은 일도 있었지요. 그는 임원 회의에서 “인간도 일종의 동물이고 100만 명이 넘는 동물을 관리하는 일은 머리 아픈 일”이라고 말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조금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첫 아내가 암으로 죽고, 동생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뒤에 궈 회장은 보다 인간적인 삶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첫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24세 연하의 발레 무용가인 정신잉과 재혼해 세 자녀를 얻으면서 그도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에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에도 직접 참가했습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 환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얼음물을 맞고 돈도 기부를 하는 이벤트입니다. 궈 회장은 교육자선단체를 설립했으며 최종적으로 자신의 재산의 3분의 1을 여기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차이나랩 서유진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