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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장애인 투표권의 그늘

중앙일보 2017.03.31 02:58 종합 33면 지면보기
김현예어젠다기획팀 기자

김현예어젠다기획팀 기자

대화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한 글자, 또 한 글자. 한 줄의 회신이 오기까지 수 분이 걸렸다. 하지만 문장에 담긴 뜻은 묵직했다. 지난 1월 중앙일보 JTBC의 시민 의견 수렴 사이트인 ‘시민마이크’에 글을 올린 허모씨 이야기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이 닿은 그는 “대리투표로 장애인들이 선거권을 직접 행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요양원에 있는 정신지체 장애인이라고 스스로를 밝혔다. 직접 투표소에서 투표하고 싶지만 그가 속한 시설에선 거소투표(居所投票)를 진행한다. 거동이 불편하니 요양원 직원이 의사를 묻고 대신 기표를 해주는데, 그는 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행 공직선거법(제38조)은 요양시설 등에 있는 장애인들이 요양원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동이 불편하니 투표소까지 오지 않고도 투표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지만, 원 취지와는 다르게 장애인들의 참정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시민마이크’ 제보 후 ‘5분이면 되는 한 표 행사, 내게는 5시간의 장벽’(본지 3월 30일자 1, 6면)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다른 장애인들 역시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A씨의 증언이다. “요양원에서 투표용지를 쭈욱 펼쳐놓고 도장을 찍었어요. 선거를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때도 많았어요.”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거소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시설 직원의 판단에 따라 종종 불법 신청이 이뤄진다. 처벌은 벌금형이나 선고유예에 그친다. 법원은 “양형 기준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든다. 경남 양산시의 한 요양시설 직원 B씨는 지난해 국회의원 선거 때 ‘의사 확인’도 없이 62명의 거소투표 신고를 했다. 그는 결국 법정에 섰다. 울산지방법원은 지난해 11월 공직선거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선고유예를 내렸다. 법원은 “거소투표 제도는 상대적으로 대리투표 등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거소투표를 희망하는지 여부를 엄격히 확인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대리투표 등 악용할 목적으로 범행한 것은 아니었다”는 이유로 선고를 유예했다.
 
거소투표장에는 ‘감시자’조차도 없다. 각 정당이 참관인을 시설에 보낼 수 있지만 적극적이지 않다. 게다가 기표소 설치는 신청자가 10명이 넘어야만 ‘의무 사항’이다. 미국 뉴욕주가 법으로 거소투표가 이뤄질 경우 당적을 초월한 감독관을 두고, ‘침대 옆까지’ 투표용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조항을 달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는 5월 9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치러진다. 우리는 언제까지 똑같은 한 표의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투표를 말로만 권할 것인가.
 
김현예 어젠다기획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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