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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박근혜, 우주의 기운에 엮였을까

중앙일보 2017.03.31 02:54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승현사회2부 부데스크

김승현사회2부 부데스크

‘옴짝달싹 못 하게 엮였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다. 정치 인생 최악의 상황에 처한 박근혜 전 대통령 얘기다. 국정농단 사건을 되돌아보면 그를 둘러싼 많은 키워드들이 올가미로 돌아왔다. 기묘한 반전과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수첩공주=반듯한 글씨로 꼼꼼하게 수첩에 적는 습관은 박 전 대통령의 신뢰감을 상징하는 별명이 됐다. 참모들도 이어받아 항상 열심히 적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타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첩은 주군을 추락시킨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대기업의 출연금을 강요하고,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뇌물 거래에 합의한 정황이 구속영장 청구서의 범죄 사실처럼 정리돼 있었다.
 
#한류=핵심 혐의가 된 미르재단 설립(대기업이 486억원 출연)을 박 전 대통령이 서두른 이유는 리커창 중국 총리 때문이었다. 최순실은 2015년 10월 하순께 리커창 총리의 방한 소식을 알고 정 전 비서관에게 “문화재단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고하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강조한 한·중 문화교류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메시지였다. 이를 전달받은 박 전 대통령은 안 전 수석에게 “서둘러라”고 지시했고,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전국경제인연합이 총동원됐다. 8일 만에 대기업의 자금 출연이 결정됐고, 문체부의 재단 설립 허가도 나왔다. 속도를 내느라 한 대기업은 정관에 서명날인도 하지 못한 하자투성이 허가였다. 그렇게 공들인 한류는 사익 추구에 이용됐고 최근엔 사드 문제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올림머리=그의 헤어스타일은 고 육영수 여사의 기품을 떠오르게 했다. 전속 미용사가 한 시간 넘게 손봐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 때에도 그 머리를 지킬 시간(평소보다는 짧았지만)이 필요했다. 그런데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이정미 전 재판관은 헤어 롤을 단 채 출근했다. 흑과 백, 선과 악처럼 두 장면이 극명하게 대비됐다.
 
#7시간=세월호 7시간은 여전히 미궁이다. 헌재와 국민들의 해명 요청은 무시됐다. 지난 22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은 같은 시간을 피의자 진술 조서가 제대로 작성됐는지 검토하는 데 썼다. 검찰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 될 긴 시간이다. ‘방치’와 ‘방어’의 시간은 왜 하필 7시간으로 똑같았을까.
 
#세월호=그가 검찰 조사를 받고 귀가하자 세월호 인양이 시작됐다. 이튿날인 지난 23일, 침몰 1073일째 되는 날 수면 위로 나왔다. 마치 박 전 대통령이 인양을 막은 듯한, 세월호의 원혼이 그의 단죄를 지켜보려 한 듯한 무서운 카르마(업:業)가 느껴졌다. 같은 날 하늘엔 노란 리본 모양의 구름이 떴다.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끝난 다음날인 31일 세월호는 뭍에 오른다.
 
박 전 대통령을 엮고 있는 소름돋는 우연들은 ‘우주의 기운’으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든 것의 시작은 박 전 대통령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김승현 사회2부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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