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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대선후보들이 잊고 있는 것

중앙일보 2017.03.31 02:51 종합 35면 지면보기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대선후보들의 윤곽이 구체화되면서 무대 위의 열기는 연일 달아오르고 있지만, 무대 밖 시민들에게도 뜨거운 관심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하기에는 아직 일러 보인다. 사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습관 때문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두 축-제도권 정치와 시민정치-사이에 일말의 괴리감이 스멀스멀 커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리라.
 

‘정책연합’ 없고 ‘승리연합’ 판쳐
정책공약도 달콤한 사탕발림뿐
청와대 축소와 소통 공약은 빈약
대선후보들, 잠시라도 조용히
이번 대선 뿌리를 돌아보기를

무대를 주도하는 대선후보들과 지금의 조기 대선을 탄생시킨 시민정치 사이의 괴리감은 두 곳에서 현저하다. 첫째, 자유한국당·바른정당 나아가 국민의당, 더불어민주당까지 뛰어들 수 있는 후보 간 합종연횡 논의에서 시민들은 확실하게 배제되고 있다. 둘째, 유연근무제(문재인), 청년 고용보장(안철수), 전 국민 안식년제(안희정) 등의 장밋빛 공약이 쏟아지고 있지만 촛불시민들이 뜨겁게 요구했던 “응답하라 2017 민주주의”에 대한 후보들의 응답은 그저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다.
 
먼저 후보들 간의 합종연횡과 시민정치의 괴리. 각 정당마다 구체적인 양상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는 당원뿐 아니라 지지자,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폭넓게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맺어진 지지자, 시민과 후보들 사이의 계약은 후보들에 의해 손바닥 뒤집듯 파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박 대통령 탄핵 과정의 결단, 따듯한 보수의 가치를 믿고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지지했던 시민들은 자유한국당과의 보수연합 시나리오 앞에서 다시 한 번 정치의 배반을 맛볼 뿐이다. 물론 정치학자들은 결선 투표 없이 단 한 차례 투표에서 단순다수를 획득하는 후보가 행정부 권력을 독식하게 되는 우리의 대통령 선거제도하에서 후보들 간의 사전(事前) 연합 형성을 ‘합리적 선택’으로 이해하기는 한다.
 
하지만 합리적 선택으로서의 후보연합은 넓게 보아 오직 선거 승리만을 앞세우는 ‘승리연합’과 가치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정책연합’으로 구분된다. 촛불민심에 화답하기 위해 신생정당의 가시밭길을 기꺼이 택했던 바른정당이 불과 수개월 만에 옛집인 자유한국당과 후보 단일화를 논의하는 데에서 가치에 대한 존중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낡을 대로 낡은 발전주의, 국가주의를 부둥켜안고 있는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후보연합은 곧 새로운 보수마저 다시금 하나의 낡은 보수로 뭉뚱그려지는 역사의 퇴행을 의미한다.
 
결국 이념과 가치를 외면하는 편의적 승리연합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역습이 이어질 것이다. 보수연합 후보를 거론하면서부터 유승민 후보의 지지율이 가라앉는 사례가 보여주듯이 (유 후보는 서둘러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시민과 지지자의 동의가 생략된 자의적 승리연합은 지지의 급격한 이탈과 변동을 부르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이념과 가치를 외면한 후보연합은 불안정한 모래성에 불과하기에 설사 당선되더라도 사상누각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 제도권 정치와 시민정치의 괴리감이 더욱 심각한 곳은 후보들의 정책공약이다. 일자리 창출, 근로시간 단축, 심지어 전 국민 안식년제까지 달콤한 공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5월 9일의 조기 대선을 불러온 시민들의 원천적 요구, 즉 시민들의 의사에 충실히 반응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을 향한 개혁 공약은 지지부진하다. 대통령을 고립된 제왕으로 떠받들어온 거대한 청와대 조직의 전면적인 축소(현재 대통령 비서실, 경호실의 조직과 인원은 핵심 부처라고 할 수 있는 여성가족부와 통일부의 조직을 합친 인원보다도 월등히 많다)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거의 실종됐다. 또한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 언론, 인터넷 매체와의 상시 소통을 어떻게 해나갈지에 대한 후보들의 참신한 다짐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동안 촛불민심,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이어져 온 시민정치의 강력한 동력은 정부의 시혜적인 퍼주기 정책을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시민들은 생활세계의 고단한 경험을 통해, 노인빈곤, 청년실업을 단번에 해결할 마법의 공식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을 우리가 일거에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난 수개월간의 함성과 촛불민심이 요란하고, 실현 불가능한 공약들의 말잔치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삶의 문제를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정부, 소통하는 대통령이 시민들 요구의 핵심이었다.
 
후보들은 지금쯤 빈틈없이 짜여진 일정, 후보 경선장의 열띤 분위기, 1000여 명을 넘나든다는 정책 참모들의 충성 경쟁 속에서 이번 조기 대선 무대가 누구에 의해, 왜 차려졌는지를 잊곤 할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진 대선후보들이 매일 잠시라도 이번 대선의 뿌리를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때, 시민들과의 거리는 좁혀지고 이번 대선의 의미는 완성될 수 있다.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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