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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로봇산업 키운다며 ‘자격증’부터 만드는 정부

중앙일보 2017.03.31 02:47 종합 2면 지면보기
다음 중 로봇이란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문학작품은 무엇인가. ①프랑켄슈타인 ②아이로봇 ③로섬의 유니버셜 로봇 ④유토피아
 

고용부, 국가자격증 17개 신설
업계 “4차 산업혁명에 숟가락 얹기
혜택 받는 곳은 학원과 검정 기관”
정부서 자격 검증, 또 다른 규제
관련 분야 하향 평준화 우려도

이 문제의 답을 아는 사람은 로봇을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는 2008년 8월 시행된 ‘로봇기술자격 1급 필기시험’에 실제로 출제됐다. 로봇기술 1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선 이런 식의 4지 선다형 문제 50개를 풀어야 했다. “로봇의 어원이 체코어로 무슨 뜻인가”를 묻고 “2진수를 8진수로 변환한 값을 구하라”고도 요구했다.
 
자료: 고용노동부

자료: 고용노동부

제어로봇시스템학회가 주관했던 이 자격증 시험은 2014년 7월 폐지됐다. “시스템을 재정비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시험 응시생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실패한 로봇 자격증이 ‘국가자격증’이란 이름표를 달고 부활한다. 지난 28일 고용노동부는 “로봇·3D 프린터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적극 대비하기 위해 로봇소프트웨어개발기사 등 국가기술자격 17개를 신설하고 자격 4개를 손질하겠다”고 발표했다. ▶로봇 기구 개발 ▶로봇 소프트웨어 개발 ▶3D 프린터 개발 등의 자격증이 눈에 띈다. 고용부는 올해 관계 부처와 자격증 신설을 협의하고 법령을 개정해 내년부터 시행한다고 했다.
 
2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7 스마트공장·자동화 산업전’에서 관람객들이 제품 불량률을 줄이는 산업 로봇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2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7 스마트공장·자동화 산업전’에서 관람객들이 제품 불량률을 줄이는 산업 로봇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정부는 이 같은 ‘4차 산업혁명 자격증’을 만들려는 이유를 “빠르게 크고 있는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국내 로봇 시장은 2014년 2조6000억원에서 2020년 6조원 규모로 커질 것이란 전망을 근거로 제시했다. 고용부는 “로봇 분야 자격증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의 야심찬 계획과 달리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2012년부터 의료용 로봇을 개발해 온 한 스타트업의 김모 대표는 “고용부가 로봇 자격증을 만들지를 논의하면서 현장 목소리를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들었을지 의문”이라며 “자격증 신설 계획은 관련 산업에 대한 몰이해와 정부의 4차 산업혁명 ‘숟가락 얹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술·과학은 물론 문화·교육의 획기적인 발상 전환을 뜻하는 4차 산업혁명을 자격증 시험으로 좇아가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마추어적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로봇 기구’ ‘로봇 소프트웨어’ 등 로봇 관련 기술은 한 응용프로그램만 습득한다고 되는 분야가 아니다.
 
현장서 원하는 건 ‘증’이 아닌 고급 인력
 
정부는 이번 계획을 발표하면서 “시장에서 활용하지 않는 국가기술자격 시험은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로봇 자격증이 실제로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수요 조사는 했는지 묻고 싶다.
 
자격증 제도는 본질적으로 해당 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요건을 검증하는 방식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요한 4차 산업혁명 분야에까지 자격증 제도가 도입되면 관련 분야의 하향 평준화를 촉진시킬 뿐이다. 정부가 기대하는 ‘첨단산업 인재의 육성’은 자격증 제도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자격증 제도가 제대로 정착을 해도 문제다. 정부가 앞장서 진입 장벽 하나를 새로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특정 기술과 프로그램에 대한 능력치를 정부가 검증하고 자격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규제다. 자격증 신설을 통해 혜택을 보는 이들은 관련 업계나 구직자가 아닌 학원과 검정 기관일 뿐이다. 이미 수많은 국가기술자격 시험이 이를 증명한다.
 
자격증을 통해 획일화된 인력을 ‘찍어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으로 필요한 인재를 길러야 한다. 정작 일선 현장에서는 관련 인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한국로봇종합학술대회’에서는 “로봇 소프트웨어를 전공한 인재가 손으로 꼽는 수준이다” “한국이 로봇 강국이라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중국·일본보다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최근 몇 년 새 로봇 관련 학과도 많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이공계 커리큘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광현 광운대 로봇학부 교수는 “현장에서 진짜로 원하는 것은 ‘자격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을 가진 고급 인력”이라며 “로봇산업을 육성하겠다며 자격증부터 만드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고로 맨 처음 질문의 답은 3번이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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