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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터지는 들꽃 … 색색 물드는 구례

중앙일보 2017.03.31 00:01
커버스토리 야생화 탐방
전남 구례 문천면 오산 기슭에 핀 노루귀. 이른 봄 꽃을 피우는 대부분의 야생화는 꽃대가 솜털로 뒤덮인 경우가 많다. 임현동 기자

전남 구례 문천면 오산 기슭에 핀 노루귀. 이른 봄 꽃을 피우는 대부분의 야생화는 꽃대가 솜털로 뒤덮인 경우가 많다. 임현동 기자

     툭툭 터지는 들꽃 … 색색 물드는 구례 


삽상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때마침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여행 욕망에 불을 지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봉우리를 열어젖히기 시작한 봄꽃입니다.
 
꽃은 우리나라 여행 산업의 가장 강력한 콘텐트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계절을 화려하게 수놓는 꽃을 좇아 상춘객의 발길이 남쪽으로 이어집니다. 거주 인구 15만4000명에 불과한 전남 광양시에는 3월 한 달간 120만 명의 여행객이 찾아옵니다. 산기슭을 가득 메운 매화꽃을 보기 위해서지요. 경남 창원시 진해구는 어떻고요. 벚꽃 시즌이 되면 18만7000여 명이 살고 있는 진해구에 200만 명이 한꺼번에 몰려듭니다. 한가로운 벽촌에 서울 시내 금요일 오후를 방불케 하는 교통체증이 벌어지곤 합니다.


지리산을 품은 전남 구례도 이름난 꽃 여행지입니다.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강변과 마을 어귀마다 꽃으로 노랗게 물든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산수유의 70%에 해당하는 약 200만 그루의 산수유가 일제히 노란 꽃을 피우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꽃동네’ 구례 사람에게 봄을 알리는 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야생화’입니다. 누구는 들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우리 꽃이라고도 부르는 작고 소박한 꽃입니다.
'보물 주머니'라는 꽃말을 가진 현호색. 

'보물 주머니'라는 꽃말을 가진 현호색.



구례 사람이 야생화로 계절을 체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겨울 끝자락에 구례 사람은 한해 농사를 준비하고자 땅을 재정비합니다. 정수리 위 꽃나무가 꽃을 맺었는지 맺지 않았는지 눈치 챌 틈 없이 땅을 갈다가 논두렁, 밭두렁, 길섶에 핀 야생화를 보곤 봄을 실감한다지요. 수 백 송이가 무리지어 흐드러지게 핀다든지, 강력한 향기를 퍼트린 다든지 하는 화려한 맛은 없지만 봄 야생화는 농부 곁을 지켜온 친근한 꽃입니다.


3월 하순 야생화를 만나러 구례로 향했습니다. 꽃을 보러 떠나는 여행은 흔히 ‘꽃놀이’라고 부르는데요, 야생화 여행은 놀이보다는 고행에 가까웠습니다. 야생화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재배 단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야생에 피어나는 꽃이라 일일이 서식지를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야생화는 무심코 지나쳐버릴 만큼 작은 꽃이었습니다. 손톱만한 꽃을 마주하려면 고개를 푹 수그려야 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무릎을 꿇어야 했고, 모자라다 싶으면 낮은 포복 자세로 납작 엎드려야 했습니다. 연약한 꽃대가 행여 입김에 쓰러질까봐 숨을 참고 꽃송이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광대나물. 줄기를 빙 두르고 있는 꽃받침이 광대의 옷깃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광대나물. 줄기를 빙 두르고 있는 꽃받침이 광대의 옷깃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렇게 만난 야생화는 자세히 볼수록 신비로웠습니다. 꽃잎이 5개의 하트(♡)처럼 보이는 ‘별꽃’도 있었고, 광대의 옷깃마냥 꽃받침에 아코디언 주름이 잡힌 ‘광대나물’도 만났습니다. 옛사람이 소화제 대신 뿌리를 캐서 먹었다는 ‘현호색’, 책장 사이에 두고 말리면 은은한 색감의 압화(押花)로 변신하는 ‘산자고’ 등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야생화가 여럿이었습니다. 눈 속에서도 핀다는 ‘복수초’, 솜털이 잔뜩 달린 꽃대 위에 하늘색·분홍색 꽃이 달린 ‘노루귀’도 반가웠습니다. 여행 중 전문가도 좀처럼 보기 힘들다는 분홍빛 ‘민둥뫼제비꽃’을 보는 행운도 거머쥐었습니다. 그간 몰라봤던 게 머쓱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봄 야생화는 대개 향이 없는 대신 밝고 화려한 색을 띤다. 희고 길쭉길쭉한 꽃잎을 가진 산자고.

봄 야생화는 대개 향이 없는 대신 밝고 화려한 색을 띤다. 희고 길쭉길쭉한 꽃잎을 가진 산자고.

봄 야생화는 색도 모양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속도’를 생존전략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봄 야생화는 신록이 우거지기 전, 거뭇거뭇한 산천에 한 송이 두 송이 툭툭 터집니다. 또 봄 야생화는 총알택시처럼 서두릅니다. 꽃을 피운 후, 2~3주 안에 열매를 맺고 씨를 퍼트리는 작업을 끝냅니다. 겨울과 봄 사이, 그 찰나를 노려야 나무 그늘에 가릴 것 없이 온몸으로 햇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야생화를 보려면 완연한 봄보다 한 발짝 앞선 이때, 여행을 떠나시라 권합니다. 짧은 생애지만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작은 생명을 마주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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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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