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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갈 때마다 꼭 가는, 고요하고 신성한 곳

중앙일보 2017.03.31 00:01 Week& 5면 지면보기

제주도에 갈 때마다 나는 오름을 오르고, 새로운 길을 찾아 걷는다. 근래에는 모슬포를 찾아갔고, 산방산 주변을 걸었고, 선흘리 먼물깍 습지를 보았다. 

제주는 새봄의 빛깔이 선명했다. 노란 유채와 남색 바다와 붉은 동백이 곱고 신비로웠다. 등대와 먼 수평선과 수평선 너머의 너른 해역을 바라보며 걷는 바닷가의 시간도 좋았지만, 돌담길과 밭길과 곶자왈과 산을 오르는 시간도 좋았다.
제주 사려니숲길에 핀 야생화.

제주 사려니숲길에 핀 야생화.

그런데 내가 제주도를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 있다. 사려니숲길이다.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에서 시작하는 약 15㎞의 숲길이다. 가까이에 절물휴양림이 있다. 해발 500~600m에 위치한 길로 아주 평탄하고 먼 길이다. 

시인 문태준 추천, 제주 사려니숲길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평일 오전 시간대에는 찾는 사람이 적어 더 한적하다. 꿩이나 까마귀의 꾸짖고 탄식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오히려 정겹다. 나무와 덩굴이 서로 마구 엉클어져 있어도 어지럽게 보이지 않는다. 돌에 낀 푸른 이끼도 싱그럽고 폭신하게 탄력이 있다. 근래에 갔을 때는 바람 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었고, 바삭하게 마른 수국도 볼 수 있었고, 곳곳의 잔설도 각별하게 눈에 띄었다. 그야말로 막바지에 이른 겨울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나는 이 숲길을 세 시간 정도 걸으면서 단순한 시간을 즐긴다. 볕과 바람과 나무와 돌과 새와 흙과 하늘과 함께 있는 단순한 시간을 즐긴다. 말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오직 걸어갈 뿐이다. 걷다 보면 어느새 근심의 체중이 줄어들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는 맑고 깨끗한 공기가 들어찬다. 그만큼 간결한 길이다. 그만큼 어떤 것에 대해서도 중언부언하지 않는 길이다.  
제주 사려니숲길

제주 사려니숲길

조릿대 구간과 삼나무 구간을 지날 적에는 몸도 마음도 한결 청량해진다. 특히 조릿대는 한파를 참고 견디는 식물로 60년~100년을 살고, 딱 한 번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후에는 곧 죽는다고 한다. 나는 조릿대 위로 바람이 불어갈 때 생겨나는 소리를 좋아한다. 내 어릴 적 어머니께서 조리로 쌀을 일 때의 그 소리인 것이다. 삼나무숲 또한 일품이다. 아름드리 삼나무는 거대한 침묵의 몸체 같다. 요지부동이고 고집스레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오히려 그들이 넉넉해 보인다. 지혜도 엿보이고, 배짱도 두둑해 보이고, 성품이 후덕해 보이기까지 한다.    
 
몽골의 시인 이스. 돌람은 시 ‘자유’에서 “꽃과 나뭇잎의 진한 향기에 취하고 / 맑은 저녁 공기에 마음은 관대해지고 새로워지리 / 달이 밝은 밤에 목청껏 노래하고 / 초조해하는 일 없이 떠돌고 싶다”라고 노래했다. 나는 사려니 숲길을 걸어갈 때 부드러운 자연을 만나고, 그리하여 넓은 마음을 얻고, 나를 바로 봄으로써 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문태준(시인)
 
작가 약력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 『그늘의 발달』『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  
‘유심작품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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