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빠른 삶, 느린 생각] 화산 위의 인생

중앙선데이 2017.03.26 02:16 524호 31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온라인 뉴스에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화산이 크게 폭발할 것 같다는 보도가 있었다. 폭발은 이미 시작되어 연기구름이 솟고, 용암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취재차 산에 올라 간 기자와 사진사들이 화구에서 터져 나오는 용암 조각에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가는 영상도 있었다. 금년 초에는 나폴리 가까이의 캄피플레그렐 산이 지진에 흔들리고 곧 폭발할 것 같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 지난해 8월과 10월에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진이 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어느 마을은 송두리 째 폐허가 된 사진도 뉴스에 나왔다. 이탈리아는 지진이나 화산 폭발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땅인 듯하다.

연기와 불을 뿜는 산 기슭에서도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이 현실
정치 부패가 흔들어 놓은 우리 삶도
이젠 조용한 평상으로 잦아들기를


캄피플레그렐 산의 폭발 징조가 두려운 것은 가까이에 인구가 밀집해 있는 나폴리 시 지역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역사에 기록된 다른 화산 폭발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캄피플레그렐 산 바로 옆에는 베수비우스 산이 있는데, 이 산도 폭발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베수비우스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폭발한 일이 있고, 20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1944년의 폭발은 주변 일대의 여러 마을들을 초토화하였다. 베수비우스의 가장 유명한 폭발은 서기 79년에 있었던 것으로 그것을 목격한 플리니우스의 기록이 유명하다. 베수비우스의 폭발은 폼페이와 헤라클라네움 두 도시를 화산재와 화산석으로 묻어 버렸다. 현재는 발굴해낸 폐허의 도시가 관광지가 되어 있다.
 
품베이 묻어 버린 베수비우스 폭발
베수비우스 화산 현장을 적은 플리니우스의 글은 지금에도 전해 내려오는 글이고 라틴어 공부에 쓰이는 교재가 되어 있다. 옛날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은 서양사에 새겨진 큰 사건으로 문학에도 더러 등장하는 테마이다. 20세기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 ‘악(惡)의 미학’에도 베수비우스의 폭발이 나온다. 시의 첫 부분에서 베수비우스 산은 한 달 내내 진동하면서, 연기와 불을 뿜어내고, 연기와 불꽃의 그림자가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런데도 시의 화자(話者)는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점심을 먹고, 자신의 삶을 그대로 계속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근본에 있어서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고, 고통스로운 것인데, 그것을 참고 견디고 평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숭엄한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 시는 2차 대전 중 쓰인 것이어서, 이 시에서 베수비우스는 전쟁의 불안을 상징한다. 시에 이야기 되어 있는 또 하나의 큰 사건은 소련 혁명이다. 이것은 빅토르 세르주가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르주는 혁명에 가담하고 그 안에서 비판적 그룹에 들어갔다가, 유배되었던 혁명가 문인이다. 그러나 크게 보아, 여기의 혁명은 숙청, 처형, 기근, 강제 노동과 같은 것을 서슴지 않았던 스탈린 시대의 일들을 마음에 두고 언급한 것일 것이다. 베수비우스 화산은 전쟁과 과격한 혁명을 상징한다. 다만 전쟁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참화라면, 스탈린 혁명은 악(惡)을 철저하게 없애겠다는 이데올로기가 일으킨 참화였다.
 
스티븐스 시의 결론은, 불안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그것은 완전히 바로 잡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니만큼 그런 가운데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의 주인공은 책도 읽고 운운하면서 자신의 삶을 산다. 그러한 삶은 삶의 근본적 불완전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보람이 있다고 스티븐스는 말한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 따듯하고, 익숙하고, 친근한 것들에 가까이 가려는 데에서 얻어진다. 애국심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한 삶은 해를 보고 뜨거운 햇빛 아래 푸르게 자라는 옥수수를 보는, 물리적 세계에 사는 삶이다. 그러면서 마음의 깊은 곳에서 밝음과 어둠을 아우르는 삶의 엄숙함과 숭고함을 깨닫는다.
 
‘악의 미학’은 거기에 들어 있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삶보다는, 스티븐스의 시가 대개 그렇듯이, 사변적 개념의 시이다. 삶의 고통이 세계의 숭고한 깊이를 깨닫게 하는 필수적인 계기라는 주장 자체가 미리 정해 놓은 개념적 결론으로 들린다. 그러나 삶의 불안정한 전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사람이라는 관찰은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삶의 현실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반드시 현실 개선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올해 초에 작고한 영국의 미술이론가?사상가 존 버거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현실의 문제에 이데올로기 일변도의 전체적 해결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시를 너무 오래 이야기하는 것은 칼럼의 성격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시 하나를 더 생각해 보겠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탈리아에서 지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산은 에트나 화산이다. 서양문학사와 관련해서 말하면, 고대 희랍의 철인(哲人) 엠페도클레스가 에트나 화산의 화구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횔덜린과 매슈 아놀드에도 이것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에트나 산이 요동한다는 뉴스는 사람이 발 딛고 사는 땅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말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에트나 산이 베수비우스처럼 그 점에 대한 큰 상징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가 화산구에 몸을 던졌다는 것은 사람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가를 상기하게 한다. 또는 화산의 존재는 지구 자체가 그러한 곳임을 말하여 준다. 아놀드의 시 ‘에트나 산 위의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엠페도클레스가 자살한 것은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한 삶이 살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살던 도시국가에서 왕위에 오를 뻔할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정치의 부패, 정쟁, 부질없는 소피스트들의 논쟁에 실망했고, 맑고 드높은 인간의 순수한 정신이 찾아 마지않는 진리를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희랍 신화의 신들과 영웅들, 산과 들과 바다와 하늘, 높고 깨끗하고 그러면서 완전히 인간적인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끝없이 흠모하고 찬미했다.
 
에트나 화산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세상이 정신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그 관점에서 볼 때, 대체로 살 만한 곳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에 비하면 이 세상의 관점에서 더 적절한 선택은 스티븐스가 말하는 것이다. 베수비우스 산의 불안정은 삶의 기본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잠정적인 삶은 또 하나의 불가피한 그러나 행복을 가져 올 수 있는 선택이다.
 
삶의 불안정 요인이 베수비우스 화산의 폭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엠페도클레스에게 정신이 설 자리가 없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가 아니다. 그의 삶의 실망의 원인의 하나는-물론 정신의 부재(不在)에 관계되는 것이겠는데-정치의 부패이다. 이 부패가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더 가까운 요인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삶의 기반이 사뭇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북한의 핵 개발, 무자비함을 뽐내는 언어들, 전쟁 위협,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의 밑에 놓인 불안의 바탕을 이룬다. 거기에다가 최근 사드로 인한 중국의 크고 작은 보복 전략은 이러한 불안을 더욱 부풀려 놓는다. 말할 것도 없이, 더 가까이서 삶의 기초를 흔들어 놓는 것은 대통령 탄핵 파면 등의 정치 이변이다.
 
다만 정치 체제가 흔들리는 데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보다 바른 정치 제체에로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처리가 힘의 대결보다는 법적 절차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정치 발전의 증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정도가 다르고, 또 목적이 다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권력과 경제의 유착은 우리 정치의 관행이었다. 비공식이 아니라, 공식적인 정치와 경제의 연결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번 일은 정치 관행의 어떤 부분에서 나온 비극적 사건이다. 그것에 휘말려든 사람들은, 개인적 의도에 관계없이 비극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적 관행이 일단락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일에는 유엔의 승인을 받고 있는 ‘지속 가능한 발전 해법망(網) (SDSN)’에서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은 155개 국가 중 58위에 놓인다. 이것은 지난해에 비하여서도 상당히 뒤로 밀린 순위이다. 상위를 차지한 나라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와 아이슬란드·스위스와 같은 나라들이고 영국·독일·미국·프랑스 등은 상위권에 들었지만, 최상위에는 들지 못했다. 싱가포르를 비롯하여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대체로 30등 아래에 놓였다. 한국은 흔히 국민총생산 지표에서는 10위 또는 11위라고 이야기된다. 그런데 이것과 행복보고서의 순위의 차이는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갖는 회의를 심화한다. 차이가 있는 데에는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이 보고서에 나온 순위에서도 경제력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보고서에 경제 이외의 평가 기준이 들어가는 것은 경제만으로 인간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행복보고서의 기준에는 소득 이외에, 건강, 기대 수명,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의존할 수 있는 사람,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너그러움, 자유, 신뢰 등이 있다. 신뢰는 정부와 기업의 부패 없는 투명성에 관계된다. 평가에는 이렇게 주관적인 가치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하여야 한다. 또 한 가지, 기대수명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덴마크 사람들이 인생에서 기대하는 것은 높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행복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친숙한 것들이 가까이 있어야 좋은 삶
행복의 요인으로 주관적인 요소, 그러나 다시 말하여 객관적으로 구성되는 주관적 요인은 강조되어야 할 요소일 것이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사회가 엠페도클레스가 말하였던 것과 같은 정신적 추구에 열려 있는 것도 좋은 삶의 요인일 것이다.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좋은 삶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가까이 있는 삶이다. 그것이 심리를 넘어 물리적으로 알 만한 작은 세계를 이룬다. 삶의 지도가 알 만하여야 행복하다는 말이다. 동네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지도의 예가 된다. 최근에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라는 화집이 출간되었다. 이것은 연쇄점들이 들어서기 전, 동네 입구 또는 가운데에 있던 식품 또는 잡화 가게를 기록한 미술인 이경미 여사의 그림들을 모은 것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마음에 와닿는 것은 그것이 일정한 범위의 물리적 한계에 자족(自足)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영국의 BBC 방송을 통하여서이다. 그것이 BBC에 보도된 것은 이러한 가게가 의미하는 삶의 모습이 외국인 기자의 마음에도 호소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큰일도 벌어지는 것이 인생이지만, 뜨거운 햇빛 아래 자라는 푸른 옥수수를 보는 일도 삶의 중요하고 엄숙한 부분이다. 그리고 사실 정치가 하는 중요한 일의 하나는 이러한 삶을 두루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는 사뭇 흔들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하겠는데 그 흔들림이 조용한 평상적인 삶으로 잦아드는 준비가 되기를 희망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