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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믿는다는 것, 거기서 작은 희망을 보다

중앙선데이 2017.03.26 00:02 524호 16면 지면보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저 멀리 내가 모르는 세상을 떠돌다 온,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날 당신은 TV에서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1년째 도주 중인 범인이 당신의 옆에 있는 그와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신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30일 개봉하는 영화 ‘분노’의 이상일 감독

30일 개봉하는 일본 영화 ‘분노(원제·怒り)’는 이런 무겁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일본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가 2014년 발표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재일 한국인 3세 이상일(43) 감독이 영화로 옮겼다. 지난해 9월 일본 개봉 당시 와타나베 겐ㆍ쓰마부키 사토시ㆍ미야자키 아오이ㆍ아야노 고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참여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지난 3일 열린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13개 우수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 감독은 1999년 ‘청(?)’으로 데뷔, ‘69 식스티 나인’(2004) ‘훌라걸스’(2006) ‘악인’(2010) 등 화제작을 연이어 선보이며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분노’는 ‘악인’에 이어 두 번째로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이상일 감독을 21일 만났다.
 

 
영화 ‘분노’ 중에서

영화 ‘분노’ 중에서

무더운 어느 여름날, 도쿄 교외 주택가에 사는 부부가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장에 남은 유일한 단서는 피로 쓰여진 ‘분노(怒)’라는 글자. 1년 후, 이야기는 세 곳의 다른 장소에서 진행된다. 치바의 어촌 마을에서 아버지 요헤이(와타나베 겐)와 살고 있는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는 외지에서 온 다시로(마쓰야마 겐이치)와 사랑에 빠진다. 도쿄의 광고회사에 다니는 동성애자 유마(쓰마부키 사토시)는 신주쿠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와 동거를 시작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나오토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한편 오키나와로 이사온 고등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외딴 섬에서 홀로 지내는 다나카(모리야마 미라이)를 만나 마음을 열게 된다.
 
원작 소설은 ‘미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세 개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요시다 작가가 보내준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이 감독은 “‘악인’ 때와는 달리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방대한 분량이나 장소의 문제만은 아니었어요. ‘분노’와 ‘신뢰’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영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제목인 ‘분노’라는 단어에 대한 감독 자신만의 해석을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분노를 갖고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되는 반면, 누군가에겐 화를 내기도 힘들 만큼의 깊은 슬픔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영화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여야 하죠. 인물들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내가 이해한 감정을 영화에 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략된 부분도 있고 소설엔 없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죠. 원작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어느 정도의 열량으로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작품으로 만들어내느냐가 그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최고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향연
이 고단한 작업을 가능케 한 것은 배우들이었다. 자신의 이름만으로 영화 한 편을 이끌고도 남을 대형 배우들이 분량도 많지 않은 역할을 기꺼이 맡아 놀라운 연기를 펼쳐보였다. 이 감독은 “캐스팅이 끝났을 때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정예멤버가 모였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원작 소설을 읽은 후 동성애자 유마를 연기하고 싶다고 감독에게 직접 연락했다는 쓰마부키 사토시는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특히 어촌 마을에서 쓸쓸히 살고 있는 부녀를 연기한 와타나베 겐과 미야자키 아오이의 연기 변신은 놀라웠다.
 
“할리우드에서 주로 활동하는 와타나베씨는 일본인들에겐 늠름하고 강한 남자의 상징이죠. 하지만 이 영화에선 약하디 약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미야자키씨도 아야코와는 달리 똑부러진 이미지이지만, 저는 배우와 배역 사이에 강한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보다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행복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는 점이죠. 배우들에게서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모습’을 끌어내는 것이 감독으로서 무척 재밌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감독이 이끄는 현장은 배우들에게 혹독한 것으로 이름 나 있다. ‘69 식스티 나인’ ‘악인’에 이어 세 번째로 이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쓰마부키는 “한번 출연하면 너무 힘들어 5년 정도는 쉬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도대체 배우들을 어떻게 괴롭히는 거냐”는 질문에 이 감독은 한참 뜸을 들인 후 “아마도 ‘이렇게 연기해달라’고 명확한 지시를 내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답했다.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하루 종일 테스트만 하기도 하고, 리허설도 다른 감독에 비해 많이 하죠.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제대로 된 장면이 나왔는지 아닌지는 배우도 감독도 아니까요. 미야자키 아오이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이상일 감독님처럼 연기 지시를 하지 않는 감독도 처음이고,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얘기를 나눈 감독도 처음이다’라고요.”
 
스크랩해븐

스크랩해븐

69 식스티 나인

69 식스티 나인

악인

악인

용서받지못한자

용서받지못한자

훌라걸스

훌라걸스

주류 밖의 인생을 향한 따뜻한 시선
이 감독은 니가타현에서 태어나 요코하마에서 조총련 학교를 다닌 재일 한국인 3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어 거장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설립한 일본 영화학교에 입학했다. ‘피와 뼈’의 최양일 감독 등 앞선 세대의 재일 한국인 감독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만든 데 비해, 이 감독은 보다 보편적인 소재로 일본 주류 영화계에서 활동해왔다. “재일 한국인이란 사실을 일상에서도, 작품을 만들 때도 크게 의식하지 않습니다. 일본 관객 중에는 제 국적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거에요. 제 영화엔 워낙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나오니 감독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요.”
 
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들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내 편이 아닌 현실에서 탈주하는 청춘(‘69 식스티나인’ ‘훌라걸스’)이나 희망을 잃은 존재들의 몸부림(‘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 등 주류에서 비껴난 사람들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나 자신이 일본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소수자, 약자라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소수자로, 약자로 태어나지는 않았죠. 그들을 약한 존재로 만드는 현실의, 외부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현실의 벽에 부딪쳐 주저앉지만 이를 넘어서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뜨겁게 그려나간다. 그는 “분노를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이코나 이즈미같은 인물은 큰 아픔을 겪은 끝에 자신 안의 분노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결국 자신 밖의 분노까지 감싸안을 수 있게 된다”며 “서로를 믿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미디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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