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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범죄소굴’ 다리 밑이 야외카페로 … 이게 요즘 건축

중앙일보 2017.03.24 01:18 종합 24면 지면보기
영국의 건축·디자인 집단 어셈블은 리버풀의 마을 재생 프로젝트로 2015년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했다. 고가 아래 우범지역에 문화공간을 만들어 주민들이 안심하고 찾을 수 있게 했다. [사진 어셈블]

영국의 건축·디자인 집단 어셈블은 리버풀의 마을 재생 프로젝트로 2015년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했다. 고가 아래 우범지역에 문화공간을 만들어 주민들이 안심하고 찾을 수 있게 했다. [사진 어셈블]

‘잘 알려지지 않은(little known)….’
 

낡은 공간에 활력 불어넣는 건축가들
저성장 시대, 대형 프로젝트 퇴색
실생활 밀접한 소소한 것들에 주목
버려진 마을 주유소를 극장으로
공장을 예술작업장으로 탈바꿈
프리츠커상 등 권위 있는 건축상
‘동네 건축가’들에게 잇따라 돌아가

‘스타 건축가와 정반대인(opposite of the starchitect)….’
 
이달 초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수상자가 발표되자 영국 가디언지와 미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수상자를 두고서 이렇게 표현했다. 국내 언론도 ‘스페인 무명 건축가가 수상자’라며 앞다퉈 보도했다. 하얏트 재단이 1979년 제정해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건축상의 수상자가 ‘듣보잡’이라는 데 전 세계 언론이 한목소리를 낸 셈이다. 올해 수상자는 스페인 건축사무소 RCR의 세 공동대표 라파엘 아란다( 56), 카르메 피겜( 55), 라몬 빌랄타( 57)다.
 
프리츠커상의 발표 두 달 전, ‘건축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내년 총감독이 선정됐다. 아일랜드 건축사무소 그라프톤 아키텍츠의 공동대표이자 여성 건축가인 이본 패럴( 66)과 셀리 맥나마라( 65)다. 건축전의 총감독은 전시의 1등상인 황금사자상의 주인공만큼 주목을 받는다. 그가 정한 주제에 따라 세계 각국의 건축가가 가장 뜨거운 건축 현장의 이슈를 전시하며 승부를 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 역시 올해 프리츠커상 수상자 RCR만큼 생소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세계 건축계에서 최고 권위의 상과 전시인 프리츠커상과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이 탈권위의 행보를 걷고 있는 걸까. 선정된 두 그룹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외에 프로젝트에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세계보다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건축계 지역 문제에 눈 돌리다=베니스비엔날레재단의 파올로 바라타 이사장은 “이본 패럴과 셀리 맥나마라는 공공 및 사적 공간, 도시공간을 포함해 더 나아가 경관으로써 영토에 관한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며 “이들은 새로운 세대를 견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두 총감독이 설립한 그라프톤 아키텍츠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주로 활동하며 사적 소유일 수 있는 건축물의 공공성을 끌어올리는 프로젝트로 주목 받았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RCR의 세 공동대표의 주요 활동지도 스페인, 그것도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소도시 ‘올로트(Olot)’에 집중돼 있다. 건축가 3인방은 올로트에서 태어난 고향 친구다. 모두 바예스 상급건축학교(ETSAV)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인구 3만4000명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88년 셋의 이름 앞자를 딴 건축사무소 RCR을 창업했다. 건축전문 출판사 아키트윈스의 이병기 대표는 “RCR은 화산지대인 지역의 원시림과 같은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는 듯 대비되는 건축 프로젝트를 즐겨 해왔다”고 전했다. 최소한으로 짓되 유리와 철판 같은 현대적인 소재를 써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이들의 주요 건축 어휘였다.
 
올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RCR의 ‘토솔-바질 육상트랙’(위). 올로토에 지은 ‘움직이는 레스토랑’의 경우 돌담 사이에 가벼운 지붕을 얹어 완성했다. [사진 Hisao Suzuki/하얏트 재단]

올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RCR의 ‘토솔-바질 육상트랙’(위). 올로토에 지은 ‘움직이는 레스토랑’의 경우 돌담 사이에 가벼운 지붕을 얹어 완성했다. [사진 Hisao Suzuki/하얏트 재단]

대표 프로젝트는 ‘토솔-바질(Tossols-Basil) 육상트랙’이다. 올로트의 도심 공원 내에 지어졌는데, 공원을 전부 밀지 않고 트랙을 포함해 경기장에 필요한 시설을 원래 땅에 살포시 얹었다. 트랙 위를 뛰다 보면 경기장보다 공원의 자연환경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자연과 스포츠가 한데 어우러진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은 “RCR은 건축물과 주변 환경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건축 재료를 선택하고 짓는 과정에서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며 “지역적이면서 세계적이다. 건축을 통해 나뉘었던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수상 사유를 밝혔다. 획일적인 세계화로 인해 지역의 가치와 예술, 관습 등을 잃어가고 있다는 건축계의 우려가 오히려 RCR의 프로젝트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이처럼 건축계가 지역사회로 눈길을 돌린 것은 저성장 시대와도 연결돼 있다. 신흥 도시들이 앞다퉈 초고층 건축물을 짓는 데 골몰하던 경제 부흥기와 여건이 달라졌다. 대형 프로젝트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동시에 스타 건축가가 각광받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운영하고 있는 싱크탱크 연구소 OMA의 수장 레이니어 드 그라프는 “경제성장과 함께 발전하며 성공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제는 실생활과 접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것들에 눈을 돌리고 질을 향상시킬지 고민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건축기획사 프로젝트 데이의 심영규 대표는 “국내에서도 제주와 부산의 경우 서울이나 해외에서 공부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특성을 살린 건축활동을 하는 젊은 건축가가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반쪽짜리 주택’. [사진 하얏트 재단]

지난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반쪽짜리 주택’. [사진 하얏트 재단]

◆터너상도 마을 재생 전문가에게=건축계뿐이 아니다. 예술계 전반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2015년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자는 건축가와 디자이너 집단인 ‘어셈블(Assemble)’이었다. 영국의 현대미술관 테이트 브리튼이 84년 제정해 한 해 동안 주목할 만한 전시나 미술활동을 보여준 50세 미만의 미술가에게 수여하는 상의 취지에 비춰 보면 다소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개인이 아닌, 20~30대 18명이 모인 단체가 터너상을 수상한 것도 터너상 31년 역사상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들의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미술의 영역 밖에 있었다. 바로 ‘마을 살리기’였다.
 
2010년 결성된 어셈블은 건축 및 공공 프로젝트를 주로 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리버풀의 오래된 공공주택을 개조한 ‘그랜비 포 스트리츠(Granby Four Streets)’다. 1900년대 노동자를 위한 공공주택 단지였지만 노후화돼 마을 주민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 마을이 프로젝트 대상지였다. 어셈블은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함께 낡은 집을 수리하고 빈집에 실내 정원을 만들며 마을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어셈블은 마을 재생 프로젝트로 방치된 제당소 건물을 예술가의 작업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사진 어셈블]

어셈블은 마을 재생 프로젝트로 방치된 제당소 건물을 예술가의 작업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사진 어셈블]

 
어두컴컴해 범죄가 잘 일어나는 고속도로 다리 밑도 어셈블의 손길이 닿자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일명 ‘폴리 포 어 플라이오버(Folly for a Flyover)’ 프로젝트다. 버려진 주유소도 극장 ‘시네롤리엄(Cineroleum)’으로, 버려진 제당소는 예술가의 작업장으로 탈바꿈했다. 공사 과정에서 나온 폐건축 자재로 마을 주민들과 재활용품 및 공예품을 만들어 SNS를 통해 팔면서 더욱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의 작업이 건축과 디자인의 본질적인 의미를 잘 살리면서 공동작업을 통해 현대미술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해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의 총감독이었던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도 도시 빈민층을 위한 ‘반쪽짜리 주택’으로 주목받았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 집의 절반만 지어주고 집주인이 열심히 일해 나머지를 짓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프로젝트였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이재민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주는 재생 프로젝트 ‘모두의 집(Home-For-All)’으로 2013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는 “과거 건축가들이 자신만의 디자인을 만들어 인정받으려고 집착하는 바람에 오히려 사회에서 멀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해 지은 모두의 집은 디자이너로서의 욕구를 철저히 배제하고 주민의 의견을 100% 반영해 지은 것”이라며 “재생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과 건축가가 함께 참여하고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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