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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이야기꾼이 합작했다 … 제비 몰러 가는 재기발랄 흥보씨

중앙일보 2017.03.24 01:04 종합 25면 지면보기
21일 저녁 서울의 한 음식점.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밤샘 악보 작업하고 연습실에 들렀다 강의 마친 뒤 잠깐 눈 붙이고 나왔다고 했다. 이어 나타난 남자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서 짙은 피곤이 묻어났다. 앉자마자 둘은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삼켰다.
 

창극 ‘흥보씨’ 만든 이자람·고선웅
이씨, 엉뚱한 음악적 아이디어 발휘
“파격적이면서도 전통 흐르는 작품”
고씨, 극본·연출로 두 번째 창극 도전
“소리의 상상력 최대한 살릴 것”

이자람(왼쪽)과 고선웅이 창극 ‘흥보씨’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처음이다. 고선웅 연출이 “언젠간만날 줄 알았어”라며 이자람 음악감독과의 협업을 소개했다.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자람(왼쪽)과 고선웅이 창극 ‘흥보씨’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처음이다. 고선웅 연출이 “언젠간만날 줄 알았어”라며 이자람 음악감독과의 협업을 소개했다.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여자와 남자의 이름은 이자람(38)과 고선웅(49). 여자는 당대의 소리꾼이고 남자는 당대의 이야기꾼이다. 두 꾼이 작품에서 처음 만났다. 창극 ‘흥보씨’에서 고선웅은 극본과 연출로, 이자람은 음악감독으로 결합했다. 두 사람이 합을 맞춘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립창극단의 ‘흥보씨(4월 5∼1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는 올 상반기 공연계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하나 둘은 너무 바빴다. 직업이 네댓 개라는 소리꾼도, 평창 패럴림픽 개·폐막식 총연출까지 맡은 이야기꾼도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창극이 뭐냐”는 질문에 두 꾼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소리꾼(이자람): 판소리는 소리꾼의 예술이다. 소리꾼 한 명의 역할을 여러 배우가 나눠 맡은 것이 창극이고. 근대에 극장이 생기면서 창극도 태어났다. 창극은 소리꾼을 배우로 쓰는 연극이다.
 
- 이야기꾼(고선웅): 나는 ‘창에 극’이라고 생각한다. ‘창의 극’이 노래로 만든 드라마라면 ‘창에 극’은 창으로 하는 극이다. 노래가 우선이라는 뜻이다.
 
- 기자: 소리꾼은 연극이라고 하고 이야기꾼은 노래라고 한다.
 
- 소리꾼: 각자 상대방의 분야를 존중한다는 뜻으로 봐달라.
 
- 이야기꾼: 창극은 드라마가 소리를 받쳐준다. ‘흥보씨’에서도 그랬다. 극본은 내가 썼지만 이 감독이 많이 바꿨다. 그래서 훨씬 좋아졌다.
 
- 소리꾼: 극본이 소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나는 다만 이야기에 음악을 입혔을 뿐이다.
 
- 기자: 분위기가 너무 훈훈하다. 정확히 어느 장면을 이 감독이 바꿨나.
 
- 이야기꾼: 극 초반 놀보와 흥보가 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대본에서는 놀보와 흥보가 차례로 소리를 한다. 이 둘의 소리를 이 감독이 섞었다. 놀보가 ‘술 잘 먹고 욕 잘하고 쌈박질은 죽 먹듯이’ 하고 제 소개를 하면 흥보가 ‘술 안 먹고 욕 안하고 쌈 안하고 쌈 말리고’ 하고 대꾸하듯이 제 대목을 한다. 대사가 대구를 이뤄 랩 배틀 같은 장면이 탄생했다. 
 
이자람(왼쪽)과 고선웅이 창극 ‘흥보씨’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처음이다. 고선웅 연출이 “언젠간 만날 줄 알았어”라며 이자람 음악감독과의 협업을 소개했다.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자람(왼쪽)과 고선웅이 창극 ‘흥보씨’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처음이다. 고선웅 연출이 “언젠간만날 줄 알았어”라며 이자람 음악감독과의 협업을 소개했다.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기자: 공연을 보름 앞둔 지금 예매율은 60%를 넘었다고 한다.
 
- 소리꾼: 오늘 1막 음악을 만들었다. 2막은 내일 만들었다(※이 감독은 말실수라고 했지만, 악보 작업만 남았을 뿐 기본 곡조와 악기 배치는 머릿속에 다 들어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 이야기꾼: 이 감독이 단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단원 대부분이 이 감독의 소리꾼 선배다. 그런데 다 제 편으로 만들었더라. 자기 주장이 분명한데도 사람을 대할 때는 털털하다. 연출가의 재능이 보였다.
 
- 소리꾼: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했지만 스태프만으로 참여한 건 처음이다. 내 정체성은 소리꾼이다. 악기가 하나라는 뜻이다. 지금은 악기가 30개나 된다. 내가 만든 소리를 30개나 되는 훌륭한 악기가 대신 해준다는 건, 나로서는 대단한 경험이다.
 
- 이야기꾼: 두 번째 창극 도전이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 때는 연극 연출하듯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번엔 연습을 할수록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연극적으로는 어색해 보여도 소리를 최대한 살리고 싶다. 드라마는 소리의 상상력을 넘지 못한다.
 
- 기자: 창극은 아직 완성된 장르가 아니다. 연출가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진다. ‘흥보씨’가 21세기 창극의 한 양식을 제안할 수 있다.
 
- 소리꾼: ‘흥보씨’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그렇다고 전통을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리꾼이 전통에서 물려받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로움을 막아서는 안 된다.
 
- 이야기꾼: 그래서 ‘흥보씨’가 잘될 것 같다. 가볍지만 격조가 있다고 할까?
 
- 소리꾼: 가볍다는 것은 고선웅식 만화적 아이디어와 이자람식 엉뚱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찰랑찰랑하다는 뜻이다. 각자 제 영역에서 선을 넘지는 않아 품격을 지킬 수 있었다(※두 꾼의 설명처럼 ‘흥보씨’는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흥보씨’의 줄거리는 ‘흥보전’의 익숙한 이야기와 거리가 있다. 살짝 공개하면 흥보가 형으로 나온다. 음악도 기발하다. 악사 9명이 18개 악기를 연주하는데, 신시사이저도 있다. 춤도 다르다. 창극 안무에 현대무용가 지경민이 참여했다).
 
- 이야기꾼: 연출보다 음악감독이 작품을 더 잘 소개한다. 역시 창극은 소리다.
 
- 소리꾼: 음악감독은 연출의 음악적 통역이다.  
 
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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