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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달러로 썰매 빌리던 나라에서 빌려주는 나라로...

중앙일보 2017.03.23 06:15
2008년 1월, 북아메리카컵 봅슬레이 경기에 출전한 한국팀. [사진 강광배 한국체대 교수]

2008년 1월, 북아메리카컵 봅슬레이 경기에 출전한 한국팀. [사진 강광배 한국체대 교수]


천지개벽한 한국 썰매

지난 16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 봅슬레이 8차 월드컵에 나서기 위해 21개국 168명의 선수들이 1373m의 얼음 슬라이딩 트랙에서 실전 훈련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 'KOREA'가 선명하게 새겨진 썰매를 타고 트랙을 내려온 외국 선수들이 눈에 띄었다. 썰매를 들여오지 못해 한국에서 빌린 썰매를 타고 훈련에 임했다.



 
한때 썰매가 없어 다른 팀에게 빌려타던 한국 봅슬레이는 이제 남에게 떳떳하게 빌려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18일 열린 봅슬레이 월드컵 남자 2인승 경기엔 한국 대표팀 외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3개 팀이 'KOREA'가 새겨진 썰매를 타고 경기에 나섰다. 장비를 들여오는데 필요한 세관 통과와 금전 등 절차 문제 등으로 이들은 썰매를 한국에 갖고 오지 못했다. 이탈리아 파일럿 패트릭 바움가트너는 "한국에서 빌려준 썰매 덕에 마지막 월드컵을 무사히 치를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지난 16일 열린 봅슬레이 월드컵 공식 훈련에서 한국 썰매를 타고 훈련을 진행한 이탈리아 대표팀. 평창=김지한 기자

지난 16일 열린 봅슬레이 월드컵 공식 훈련에서 한국 썰매를 타고 훈련을 진행한 이탈리아 대표팀. 평창=김지한 기자

 
2008년 1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북아메리카컵에 출전한 한국 봅슬레이 팀은 'USA'와 '솔트레이크 2002'가 선명하게 새겨진 미국대표팀의 중고 썰매를 500달러(약 56만원)를 주고 빌려 탔다. 기존에 강원도청 팀에서 갖고 있던 썰매가 망가져 탈 수 있는 장비가 없어지자 고육지책으로 빌렸다. 그럼에도 남자 4인승에서 국제 대회 첫 3위에 오른 스토리는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당시 대회에 나섰던 강광배 한국체대 교수는 "외국에서 썰매를 타려면 돈 주고 빌려타야 했다. 스키 강사 등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모으기도 했다. 그땐 썰매를 타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때였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팀에 썰매를 빌려준 그는 "다른 나라에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되돌려주고 싶었다. 썰매가 없어서 경기를 못 치르는 경우가 생겨선 안 되지 않나. 옛날 우리 팀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돈 주고 썰매를 빌려탔던 강 교수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팀에겐 무상으로 빌려줬다.
 
 
[김유란-김민성/20170302/평창/박종근] 여자 봅슬레이 북아메리카컵 2016-2017시즌 랭킹 1위인 김유란-김민성 팀이 2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유란-김민성/20170302/평창/박종근] 여자 봅슬레이 북아메리카컵 2016-2017시즌 랭킹 1위인 김유란-김민성 팀이 2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내년 2월 열릴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가장 환경이 많이 바뀐 분야는 썰매 종목이다. 올림픽 썰매 전 종목(봅슬레이, 스켈레톤, 루지)에 출전한 강 교수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평창올림픽 썰매 경기가 열릴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는 외국 선수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세계 최초로 지어진 실내 트레이닝장과 넓은 휴게 공간, 트랙 전 구간에 지붕이 설치돼 눈바람이 몰아치는 중에도 경기에만 몰입할 수 있는 경기장 환경에 각 국 선수, 코칭스태프는 만족해했다. 봅슬레이 여자 세계 1위 파일럿(조종수) 카일리 험프리스(캐나다)는 "경기장 시설이 매우 선수 친화적이다. (자국에서 열린) 밴쿠버올림픽 때 탔던 트랙 이상으로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동안 국제 대회에서 다른 나라 팀들의 눈치를 보고, 트랙이 파손되면 거친 말을 들어야 했던 한국 썰매는 다른 팀들이 가장 눈여겨보고 주목하는 팀이 됐다. 최근 국제 대회에서 괄목할 만 한 성적을 낸데다 올림픽 개최국으로 홈 이점을 활용해 많은 훈련을 해온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침이나 밤 늦게 다른 팀들의 시선을 피해 훈련해온 한국 선수들이 공식 훈련에 등장하기만 하면 다른 나라 스태프들이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남자 스켈레톤 세계 1위 마틴 두쿠루스(라트비아)는 "시설이 최신식이라 흠잡을 데 없이 좋다"고 말했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봅슬레이 남자 4인승 금메달을 땄던 스티븐 홀컴(미국)은 "한국은 이제 썰매 전 종목을 통틀어서 강국이라고 부를 만 하다. 평창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가져갈 수도 있다"면서 "그들이 어떻게 썰매를 타는지를 보는 게 다른 팀에겐 큰 흥밋거리"라고 말했다.
 
 
좋아진 환경 만큼 성적도 향상됐다. 시즌 마지막 대회로 열린 평창 월드컵에서 남자 스켈레톤 윤성빈(강원도청)은 지난 시즌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엔지니어 교체, 성적 부진 등으로 힘든 시즌을 보냈던 남자 봅슬레이 2인승 원윤종(강원도청)-서영우(경기도연맹)는 종합 3위를 차지했다. 달라진 환경과 분위기 만큼 이제 한국 썰매 종목에 남은 건 올림픽 사상 첫 메달이다. 이용 봅슬레이·스켈레톤대표팀 총감독은 "평창 트랙을 타면서 (더 잘 타기 위한) 과제가 더 생긴 것 같다. 남은 건 더 많이 연습하고 준비할 뿐"이라면서 "올림픽 때까지 외국 선수들보다 500번 더 타겠다. 한 치의 실수 없이 준비해 좋은 결과를 얻겠다"고 말했다. 지난 21일부터 실전 훈련을 재개한 대표팀은 다음달 초까지 진행한다. 
 
 
평창=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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