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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좀비의 길 걷는 대우조선

중앙일보 2017.03.23 03:34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선거 때면 유독 기승을 부리는 적폐(積弊)가 하나 있습니다.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덩치 큰 놈은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로 거대 좀비 기업이나 부실 금융회사가 수혜자입니다. 표가 되는 노동자 수가 많은 데다 청산하면 많게는 수만 명의 일자리가 날아갑니다. 그러니 정치권이 앞장서 국민 혈세를 쏟아부어 연명시키기 일쑤입니다. 꼭 청산돼야 할 적폐지만,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조원 구조조정은 불가”
선거철 적폐부터 청산을

2015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민주당 경선이 한창이던 그때 대마필사(大馬必死·Too big to exist)법을 발의했습니다. 그는 “어떤 금융회사도 수백만 미국인과 미국 경제의 안녕을 흔들 정도로 거대해져서는 안 된다. 그 전에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샌더스의 구상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평소라도 어려울 일을 하필 선거판에 벌였으니 실현됐다면 되레 이상했을 겁니다.
 
대마, 대우조선해양도 불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대마불사엔 공식이 있습니다. 우선 정부·채권단이 겁을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산업은행은 며칠 전 “(대우조선) 파산 땐 58조원의 손실이 난다”고 했습니다. “무섭지요?” 한번 으른 겁니다. 다음은 해법을 내놓습니다. 아주 강력한 것, ‘법대로’를 먼저 강조합니다. 지난주 언론은 일제히 ‘대우조선, 프리패키지드(P) 플랜(워크아웃+법정관리) 검토’ 기사를 실었습니다. 사전에 계획을 다 세워놓고 3~4개월의 짧은 기간에 강제적으로 채무를 조정하는 방안입니다. P플랜도 일종의 법정관리라 최악의 경우 채권자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겁을 준 뒤엔 제3의 대안을 내놓습니다. ‘자율적으로’ 채권자가 손실을 떠안도록 하는 겁니다. 받을 돈을 주식으로 바꿔 넣거나 덜 받게 하는 것입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자율 협의가 안 되면 (법정관리 등) 강력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금융감독원은 은행 간부들을 불러 팔을 비틀었습니다. 아마 다음달 열릴 채권자 협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될지도 모릅니다. 한 푼도 못 받기보다 50%라도 돌려받는 걸 반대할 채권자는 없을 겁니다.
 
정부·채권단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화룡점정, 정치권의 화답이 남았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9일 창원에서 “조선업을 살려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지금의 불황만 넘기면 조선 산업이 효자 노릇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그분이 조선업 전문가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또 “금융 채권자는 고통 분담하되, 노동자와 중소 협력업체들의 고통이 추가되면 안 된다”고 잘랐습니다. 역시 특유의 편가르기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채권자는 네 편, 노동자는 내 편입니다. 네 편의 적폐는 청산 대상, 내 편의 적폐는 보호 대상입니까? 이런 게 문재인식 적폐 청산인가요?
 
임종룡은 “오직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시급한 일, 빨리 할수록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게 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정말 강력한 자구 노력입니다. 임종룡은 “노조에 동의서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됩니다. 2015년 4조2000억원을 집어넣을 때도 정부는 노조 동의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말까지 예정했던 자구노력은 3분의 1밖에 안 했습니다. 특히 인건비 감축은 고작 9%에 그쳤습니다. 100명을 줄이기로 약속해놓고 9명만 줄인 꼴입니다. 그것도 얼마 안 되는 사무직 위주로 정리했습니다.
 
금융위는 오늘 대우조선의 회생계획을 밝힙니다. 인력을 줄이고 자산을 쪼갠 뒤 매각까지 포함하는 확실한 대마필사 방안이 담겨 있지 않다면 대마불사를 위한 수순 밟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윈스턴 처칠의 말로 맺겠습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 누구나 좋아할 일은 하나같이 올바르지 않다. 반면 올바른 일이면 아무도 내켜 하지 않는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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