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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황교안 불출마는 시작이다

중앙일보 2017.03.17 02:19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논설위원

최상연논설위원

우리 정치를 보고 있자면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상대 골문 앞에서 금방 골이 터질 듯해 애가 타는 판인데 공은 순식간에 우리 골문 앞으로 넘어와 있기 일쑤다. 우리 공격수가 골을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편 실책이 우리 득점으로 이어질 때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정치판엔 경쟁자가 실수로 무너질 때까지 버티는 게 정치 9단의 비법이란 농반진반의 금언이 있다.
 

인물 기근으로 시작된 보수 위기
이참에 명망가 정당 체질 바꾸길

문재인 전 대표의 롤러코스터가 그런 경우다. 지금이야 기세등등한 대세론 주자지만 1년 전만 해도 재·보선에 완패한 패장이었고 책임론을 외면하던 아슬아슬한 처지였다. 안철수 전 대표가 당을 뛰쳐나가자 4월 총선을 비문(非文) 선수인 김종인 비대위로 치러야 했다. 그런 그를 불과 몇 달 만에 한국 정치의 대안으로 떠올린 에너지는 스스로 만든 게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살골이다.
 
똑같은 식이라면 지금 망가진 보수에겐 문재인과 친문, 친노가 자책골로 무너져야 제대로 된 재건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다. 실제로 여의도에선 그런 식의 얘기가 많다. 이번 대선은 문재인 판이다. 하지만 친박 패권에 질린 민심이 친문 패권을 용납할 리 없고 2년 뒤 총선은 보수 싹쓸이란 것이다. 뭐 그럴 법한 기대 겸 전망이다. 영광의 순간도 절망의 나날도 이 또한 지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
 
박 전 대통령이 ‘진실은 밝혀진다’며 탄핵심판을 비웃고 친박 의원들이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건 그런 심정이 바탕일 게다. 언젠가 친문 패권이 대형 자살골을 터뜨리면 재기의 기회가 온다는 믿음 말이다. 개헌을 얘기하는 같은 당 의원들에게 ‘반문질’이라고 발언 횟수를 체크하는 친문 패권이다. 벌써부터 완장 찬 점령군 모습에서 친박은 그런 가능성을 읽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설사 ‘영남 자민련’이 되더라도 무조건 버티자는 결의를 다지는 거다.
 
문제는 그때까지의 보수 정치 공백이다. 더 큰 문제는 그냥 뭉갠다고 영남 자민련이 저절로 탄생할지도 의문이란 거다. 선거는 감동인데 자기 희생과 솔선수범 없이 감동의 에너지가 만들어진 경우란 없다. 폐족으로 몰렸던 친노가 부활한 데는 목숨을 던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장함이 있었다. 대구·경북(TK) 민심을 무슨 맡겨 둔 재산인 것처럼 인질로 잡겠다는 발상도 우습지만 태극기를 탈출구 삼고 국회선진화법 개정에 몽니나 부리는 수준으로 과연 나라를 경영할 재기의 밑천을 만들 수 있을까.
 
보수가 다시 일어서려면 먼저 무너진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야 한다. 현재의 보수 위기는 인물 기근이 출발점이다. 그러나 인물난을 만든 근본 원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의 패권 정치가 진앙이다. 나라는 안중에 없고 개인과 계파 이익이라면 극악스럽게 달려든 몰상식에 떠나간 마음이다. ‘원칙과 신뢰’가 박근혜의 대표 브랜드였던 만큼 배신감은 증폭됐다. 친박 패권을 바라보는 TK 민심이라고 다를 게 없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주된 기준점은 북한이다. 나머지 분야에선 두드러진 입장 차를 느끼기 힘들다. 진정한 보수라면 친문 패권과 종북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그러자면 친박 패권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내려놓는 게 우선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불출마는 하나의 물꼬다. 친박 패권 당사자라면 개인 비서를 자처할 게 아니라 은퇴와 후퇴에 줄 서는 게 상식이다. 그래야 갈라선 보수가 힘을 모으고 새 인물을 발굴하는 길이 열린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황교안 대행마저 링을 떠나 보수는 이번 대선을 팀으로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 기회에 오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명망가 정당 체질을 확 바꿔 반패권의 시스템 정치, 범보수 연대 정치의 새 길을 찾아내야 한다. 적군 망하는 걸 기다리며 똬리 틀고 버티는 오기(傲氣)만으론 보수의 분열을 막을 수 없다. 정권을 헌납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캐머런 전 총리가 영국 보수당을 되살린 신의 한 수도 ‘무조건적 반대는 안 된다’가 만든 감동이었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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