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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 기타노 다케시 … 이들이 또 찾는 그녀

중앙일보 2017.03.17 01:00 종합 23면 지면보기
강민하 번역가는 “영화 한 편을 번역할 때 적어도 20번 이상은 돌려 본다”며 “번역 역시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유행어나 원작에 없는 말을 넣으라는 영화사의 요구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민하 번역가는 “영화 한 편을 번역할 때 적어도 20번 이상은 돌려 본다”며 “번역 역시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유행어나 원작에 없는 말을 넣으라는 영화사의 요구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대 말 ‘러브레터’부터 최근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까지.
 

일본영화 자막 번역가 강민하씨
‘너의 이름은.’‘기쿠지로의 여름’등
17년간 200편 감칠맛 나게 매만져
“AI 발달해도 번역은 인간의 영역”

번역가 강민하(41)씨는 지금까지 200여 편의 일본영화 자막을 번역했다. 극장에 걸리는 일본영화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쳤다. 이와이 슌지, 기타노 다케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미야자키 하야오, 호소다 마모루 등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꼭 그를 다시 찾는다는 건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작업한 ‘너의 이름은.’은 역대 일본영화 최고 흥행작(364만 관객)이 됐다. 이전까지 일본영화 최고 흥행작은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301만 관객)이었는데, 이 작품 또한 강씨가 번역을 했다.
 
서울 대치동의 한 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난 강씨는 “관객 요청에 따라 ‘너의 이름은.’ 더빙판이 올 여름 개봉한다”며 “조만간 대본 작업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너의 이름은.’은 남녀 주인공의 몸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등장한다. 도쿄에 사는 소년 타키의 몸에 들어간 시골소녀 미츠하가 여성 언어와 사투리를 쓰면서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식이다. 강씨는 이런 부분을 번역하는 게 꽤 힘들었다고 했다. 우리말엔 일본어처럼 남성·여성 언어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
 
고심 끝에 그는 자신을 객체화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화법과 겸양어를 사용했고,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강씨는 “의역이 아닌, 창작의 수준이었다”며 “사투리 자막은 진지한 장면에서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에 표준어로 바꿨다”고 했다. ‘무녀(여고생)가 씹어서 만든 술’이란 대사를 ‘무녀(여고생) 입 술’로 바꾼 것도 재치있는 번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번역작업을 하면서 세월호 사건이 연상됐는데, 나중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세월호 사건에 충격받아 가만히 있으라 라는 대사를 넣었다’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했다.
 
강민하 번역가는 “영화 한 편을 번역할 때 적어도 20번 이상은 돌려 본다”며 “번역 역시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유행어나 원작에 없는 말을 넣으라는 영화사의 요구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민하 번역가는 “영화 한 편을 번역할 때 적어도 20번 이상은 돌려 본다”며 “번역 역시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유행어나 원작에 없는 말을 넣으라는 영화사의 요구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 관객이 웃는 장면에서 한국 관객이 웃지 않는다면 잘된 번역이 아니죠.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 않아 유행어는 쓰지 않습니다. 신파조로 만들어 달라는 영화사 요구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요.” 강씨의 번역 철학이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일본어를 공부한 그는 97년 교환학생으로 간 일본에서 국내 영화주간지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영화의 매력에 눈을 떴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통역 등의 일을 하면서 전문 번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자막 번역도 글 쓰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의 꿈이 결국 이뤄진 셈”이라며 “번역 일을 17년간 해왔지만, 지금도 사전 용례를 찾아보며 작업한다”고 말했다.
 
강씨는 ‘러브레터’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고 했다. 명대사 ‘오겡키데스카’를 중의적인 의미의 ‘잘 지내십니까’로 번역했고, 이후 이와이 슌지 감독은 “나의 언어를 가장 잘 아는 번역가”라며 소설번역까지 맡길 정도로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한 영화 중 ‘기쿠지로의 여름’(기타노 다케시 감독)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엄마 찾아 길 떠난 아이의 눈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용기, 성장을 표현해냈다”는 게 이유다.
 
인기 공룡 애니메이션 ‘고녀석 맛나겠다’ 3편의 프로듀서로도 일하고 있는 그는 올 여름 개봉하는 영화 ‘군함도’의 일본어 대사 자막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강씨는 “아무리 번역 프로그램과 인공지능이 발달한다 해도, 문학 창작물의 언어문화적 차이까지 감안해 번역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단언했다.
 
글·사진=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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