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거진M] '23아이덴티티'& '해빙', 영혼의 상처를 보여준다는 건…

중앙일보 2017.03.16 00:03

‘23 아이덴티티’와 ‘해빙’은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혼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조심히, 더 신중히 다뤄야 한다.



살면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육체적 상처는 ‘상처(傷處)’란 한자어의 의미 그대로 다친 흔적을 남긴다. 흉터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영혼은 어떨까? 영혼의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 동일한 흔적이 남지도 않으며 비슷한 상처로 가늠할 수도 없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이렇듯 영혼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증상’으로 보여 준다.
 
23 아이덴티티 / 사진=영화사 제공

23 아이덴티티 / 사진=영화사 제공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복귀작 ‘23 아이덴티티’(2월 22일 개봉)는 영혼의 상처와 흉터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샤말란 감독은 언제나 상처 입은 자들을 주목해 왔다. 첫 영화 ‘식스 센스’(1999)의 주인공 콜(할리 조엘 오스먼트)만 해도 그렇다. 이처럼 그의 영화 속에서 상처 입은 자들은 ‘외톨이’나 ‘왕따’라는 증상을 지닌 채 등장한다. 이런 상처는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어서, 타인과 공유하거나 남들에게 공감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감기나 장염처럼 모두가 한 번쯤 걸리는 병이라면, 누구든 연민을 느끼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학대나 성폭행과 같은 상처는 그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 자체가 오히려 그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을 테니까.
 
‘23 아이덴티티’의 로그라인은 ‘상처 입은 자는 진화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주인공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스스로의 인격을 다중으로 분리해 내면적 상처에 적응해 간다. 고통과 상처를 견디기 위해 스물세 개의 인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심리적 적응과 발명을 ‘진화’라 부른다. 마치 강한 억제력으로 분재한 식물이 아름다워 보이듯, 상처가 영혼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해빙

해빙

 
‘해빙’(3월 1일 개봉, 이수연 감독) 역시 영혼에 상처 입은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울 강남에서 번듯한 병원을 운영했던 내과 의사 변승훈(조진웅). 어느 날 그는 경기도 신도시의 병원에 ‘페이 닥터(봉급을 받는 의사)’로 내려온다. 무리하게 개업했던 자신의 병원이 결국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혼까지 하게 된 승훈은 낯선 도시에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 물론 더 이상 병원을 운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바로 실패한 인생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 문제는 낮은 회복탄력성이다. ‘회복탄력성’이란, 역경과 실패를 도약의 발판 삼아 오히려 더 높이 튀어 오르는 심리적 근력을 의미한다. 승훈은 자신의 실패를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그 실패가 남긴 상처로 인해 괴로워한다.
 
‘23 아이덴티티’의 케빈과 ‘해빙’의 승훈은 고통으로 인해 훼절된 영혼을 가진 인물들이다. 영화 속 캐릭터 중에는 대개 이들처럼 고통으로 인해 심리적 왜곡을 경험한 경우가 많다. 케빈은 어린 시절 학대의 상처로 인해 여러 인격을 갖게 됐는데, 이를 온전한 극복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련에 대한 승훈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통을 겪은 후 그들의 정신에는 비대한 상처가 생기고, 이 상처는 마음에 흉측한 흉터를 남긴다. 신체에 남은 흉터야 눈으로 상태를 확인할 수 있지만, 영혼에 생긴 상처는 쉽게 감지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스스로 영혼에 상처 입은 사실을 아예 모르고 살아가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보이지 않기에 그 상처는 더욱 조심히 다뤄야 한다.
 
23 아이덴티티 / 사진=영화사 제공

23 아이덴티티 / 사진=영화사 제공

우리가 어떤 영화의 도덕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장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영화 속 캐릭터가 지닌 상처를 그저 서사적 함정이나 반전의 미끼로만 활용한다면,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전시(展示)하는 것에 불과하다. 전시된 상처는 어쩌면 포르노그래피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증상으로 보여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역할 중 하나다. 그러므로 영혼의 상처를 다룰 때는 더 조심히, 더 신중하게 다가가야 한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글=강유정 영화 평론가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