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董狐之筆<동호지필>

중앙선데이 2017.03.12 04:02 522호 33면 지면보기

 춘추시대 진(晉)나라 양공(襄公) 때 조순(趙盾)은 재상으로서 큰 공적을 쌓았다. 한데 양공에 이어 젊은 영공(靈公)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크게 변했다.


영공은 어리석은 데다 포악했다. 높은 정자 위에 올라 지나가는 행인을 활로 쏘아 맞히는 놀이를 즐겼다. 조순이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듣지 않을 뿐더러 몇 차례나 조순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결국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순은 국경 가까이 달아났다. 이때 조천(趙穿)이 심복을 시켜 영공을 죽였다. 그러자 조순은 도성으로 돌아와 새 군주를 세우고 자신은 계속 재상 자리를 지켰다.
 
이후 사관(史官) 동호(董狐)가 이 사실을 역사에 기록하며 ‘조순이 임금을 시해했다’고 썼다. 깜짝 놀란 조순이 동호를 찾아와 항변했다.
 
이에 동호는 “대인께서는 영공을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으나 그 당시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아 국내에 있었고, 또 조정으로 돌아와선 범인을 처벌하려 하지도 않았으니, 대인께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라 했다.
 
조순은 자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동호의 뜻에 따랐다. 여기에서 ‘동호의 붓’이란 뜻의 동호지필(董狐之筆)이란 말이 나왔다. 역사를 기록함에 어떤 권세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써서 남기는 일을 이르는 성어다.
 
비슷한 말로 역사를 기록함에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곧게 쓴다는 태사지간(太史之簡)이 있다. 태사는 사관을, 간(簡)은 문서를 의미한다.
 
또 대의명분을 올바르게 밝혀 세우는 사필(史筆)의 준엄한 논법을 비유해 이르는 말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이 있기도 하다.
 
이런 동호지필이나 춘추필법의 정신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맞물려 21세기 대한민국 정치 상황에서 유용한 말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유상철
논설위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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