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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것 콕 집어 삭제 가능한 날 온다

중앙선데이 2017.03.12 03:57 522호 30면 지면보기
 [조현욱의 빅 히스토리] 기억 취사선택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이 고통스러운 결별의 기억을 지우는 장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이 고통스러운 결별의 기억을 지우는 장면.

“기억한다는 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다(To remember is to live).” 신학자 마틴 부버의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기억이 악몽이라면 어떻게 되나. 침몰한 세월호에서 학생들의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이 그렇다. 캄캄한 물속에서 퉁퉁 불은 시신을 꼭 끌어안고 선실의 비좁은 복도를 헤엄쳐 나온 지옥의 시간을 이들이 잊을 수 있을까? “물컹하게 무엇인가 잡힙니다. 저는 곧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건 사람의 살입니다. 그 살을 잡아당깁니다. 풀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제 얼굴을 덮습니다.”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 중에서)
 

한번 인출된 기억 재강화엔
새로운 단백질 합성이 필요
전기충격·약물로 재강화 방해

이것은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이 일으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이다. 사건을 반복해서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공포와 분노, 피해의식을 느끼며 악몽을 꾸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정신과 치료, 최면, 약물, 신경 차단 치료와 집단요법 등이 있지만 치료는 사실 어렵다. 증상이 자꾸 되살아나는 것이다.
 
임상의들이 이를 억제하는 데 성공하는 사례가 가끔 있다. 자신의 행동습관을 스스로 인지해 치료해 나가는 인지행동요법과 약물 사용을 병행한 덕분이다. 약은 고혈압, 불안, 두통 치료제인 프로프라놀롤을 사용한다.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지 몇 시간 내에, 즉 기억이 굳어지기 전에 치료를 받아야만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이터널 선샤인’ 같은 대책 가능
방전을 통해 빛을 내는 제논 가스. 기억을 지우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위키미디어 커먼스]

방전을 통해 빛을 내는 제논 가스. 기억을 지우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위키미디어 커먼스]

2004년 개봉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와 같은 대책은 없을까. 여기서 과학자들은 어느 커플이 공유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결별의 기억을 지워준다. 이 같은 치료법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트’가 지난달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과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잘 변한다.
 
실제로 사고나 폭력, 테러나 전쟁의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약, 전기충격 심지어 비디오 게임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의 초점은 기억이 일으키는 감정적 자극을 제거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기억 자체를 마음대로 삭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핵심은 인출된 기억이 다시 저장돼야 한다는 데 있다.
 
만일 독자가 이 칼럼의 일부를 며칠 후 기억한다면 뇌의 배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읽은 지 몇 시간이 지나거나 하룻밤 잠을 자고나면 초기 기억은 강화돼서 장기 기억으로 바뀐다. 한 무리의 유전자 스위치가 켜지면서 신경세포의 연결을 바꾸고 강화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낸 덕분이다. 이 과정이 완결될 때 한 건의 영구 기억이 정착된다. 이때 녹음이나 영상 기록과 같은 것이 저장된다고 과거에는 믿었다.
 
하지만 2000년 뉴욕대에 있던 신경과학자 카림 네이더의 연구가 이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쥐에게 특정한 소리를 들려주면서 전기충격을 가했다. 공포를 학습시킨 것이다. 그 다음엔 충격 없이 소리만 들려주면서 단백질 합성을 저해하는 약물을 뇌에 주사했다. 그러자 쥐는 소리에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특정 기억만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소리를 들려준 지 6시간 후에 놓는 주사는 효과가 없었다.
 
결론은 이렇다. 장기 기억은 인출된 후 3~4시간 동안 변화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다시 기억되려면 단백질이 새롭게 합성돼야 한다. 스스로를 유지, 강화, 수정하는 적극적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재강화(reconsolidation)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것은 사람뿐 아니라 게·닭·꿀벌·물고기와 다양한 설치류에게도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현상을 이용한 다양한 요법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3년 뉴욕대의 신경과학자 마리즌 크로즈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전기충격 요법을 받고 있던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 그는 불쾌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스토리를 보여주었다. 자동차 충돌 사고와 폭행 사건이었다.
 
일주일 뒤 그는 자원자들에게 이들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암시를 준 뒤 전기충격을 받게 했다. 그리고 24시간이 지나 검사하자 이들은 해당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충격이 기억의 재강화를 방해한 것으로 해석된다.
 
같은 맥락에서 앞서의 혈압약 프로프라놀롤도 효과가 있었다. 캐나다 맥길대학의 임상 심리학자 알랭 브루네의 연구를 보자. 2015년 4월의 네팔 지진, 11월의 파리 테러를 겪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처음에 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겪은 사건의 가장 나쁜 측면을 적어내게 만들었다. 그 후 약 1회분을 1주일 간격으로 6주간 복용시켰다. 이들은 매번 약의 영향 하에서 자신이 쓴 글을 읽어서 사건을 떠올렸다. 그러자 3명 중 2명꼴로 해당 기억을 억누르는 효과가 나타났다. 이는 정신의학적 치료와 같은 수준이다.
 
이 약은 공포증 제거에도 효과가 있다. 201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머렐 킨트의 연구다. 그녀는 거미를 평생 두려워해온 자원자들에게 사육용 유리 용기에 들어있는 대형 독거미 타란튤라를 2분간 마주보라고 요청했다. 방에서 나온 직후 프로프라놀롤을 복용하게 했다.
 
그로부터 하루, 한 달, 일년 후에 그 사육용기 앞에 다시 서라고 이들에게 요청했다. 일부는 처음에 자신의 거미 공포증이 과거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약을 먹은 사람은 전원 그 방에 들어갔으며 가짜 약을 먹은 집단보다 더욱 차분하고 안정돼 있었다. 심지어 이들 대부분은 거미를 만지거나 집어들고 싶어했다.
 
약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연구자들은 단백질 합성을 직접 방해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혈압을 낮춰줌으로써 스트레스나 감정에 따른 생리적 증상을 진정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약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먼저, 기존의 소거요법에 재강화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소거요법이란 안전한 환경에서 총소리 같은 위험의 단서를 되풀이 해 접하게 해서 그에 따른 두려운 연상을 없애려는 치료법을 말한다. 효과는 어느 정도 있지만 기억이 되살아나는 일이 흔하다는 게 문제다.
 
텍사스 오스틴대학의 신경과학자 마리 몽피스의 연구결과를 보자. 몽피스 팀은 들쥐에게 특정한 음악소리에서 전기충격을 연상하도록 학습시켰다. 충격 없이 음악만 19차례 들려주자 쥐들은 점점 공포를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들의 두려움은 되돌아왔다.
 
연구팀은 다른 쥐들을 대상으로 공포 기억을 한 번 환기시킨 뒤 재강화가 시작되도록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 후 음악소리를 반복해서 들려줬다. 그 결과 해당 기억이 영구히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여러 시간이 지난 후에 소거요법을 받은 쥐들은 재발했다.
 
소거요법, 테트리스 게임도 효과
테트리스 게임도 효과가 있다. 스웨덴 카롤리스카 연구소의 메릴리 홈즈와 영국의학연구협회의 엘라 제임스의 연구를 보자. 연구팀은 자원자들에게 비참한 사건의 비디오를 시청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관련 이미지들을 보여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 뒤 테트리스 게임을 시켰다.
 
이 게임이 선택된 것은 뇌에서 시각 및 공간 처리 영역에 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것이 나쁜 기억의 재강화 과정과 경쟁한다는 것이 요지다. 효과가 있었다. 의도적인 기억 인출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마음에 거슬리는 회상을 줄여주는 것으로 보였다.
 
기억을 지우는 약의 개발도 가능하다고 한다. 2006년 브루클린 소재 뉴욕 주립대의 신경과학자 토드 색터는 그것이 없으면 기억이 약해지고 사라져버리는 분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 효소는 신경세포의 연결부위인 시냅스에 머물고 심지어 아마도 자기복제까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이 효소를 투입한 생쥐들은 기억력이 예외적으로 좋아졌다. 이것이 없는 생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재강화 과정에서 특정 화학물질(ZIP)을 이용해 문제의 효소를 차단하면 해당 기억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했다. 심지어 약물 중독이 된 설치류에게서 약물을 갈망하게 만드는 기억을 줄여주기까지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ZIP은 독성이 있어서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역할을 하는 무해한 물질이 개발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충격과 공포, 불안을 느끼게 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 1953.

충격과 공포, 불안을 느끼게 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 1953.

 
사실 기억은 불안정한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그 이유의 하나는 기억을 구성하는 분자가 재편성 되는 데 있다. 단백질, 지방을 비롯해 세포를 구성하는 복합 분자는 존속기간이 대개 며칠에서 몇 분에 불과하다. 세포는 안정된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연약한 존재다.
 
뇌세포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세포의 형태와 시냅스의 구조가 뇌의 기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포에 내부 구조를 부여하는 가느다란 단백질 섬유는 반감기가 몇 분에 불과하다. 시냅스를 채우고 있는 단백질은 3~4일마다 교체가 필요하다. 심지어 DNA도 수선이 필요하다. 이번 주 당신의 뇌는 지난주와 다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갱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억을 변경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조현욱 과학과 소통 대표
poemloveyo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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