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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친구처럼 설득 ‘노변담화’ 노하우 알았더라면 …

중앙선데이 2017.03.12 03:04 522호 24면 지면보기
[세상을 바꾼 전략] 루스벨트의 소통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일 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후 회견장을 떠나고 있다. 김성룡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일 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후 회견장을 떠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은행에 대해 몇 분간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은행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는 소수의 국민뿐 아니라, 특히 단순히 은행에 돈을 넣고 빼는 대다수의 국민과 말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어떤 조처가 이뤄졌고 또 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말하고 싶습니다. (중략) 우리나라 금융 시스템의 재정비에서 돈보다 또 금보다 더 본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국민 신뢰입니다. 신뢰와 용기가 우리 계획의 성공에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소문과 의혹에 선동되지 말아야 합니다. 합심하여 공포를 떨쳐냅시다. 우리나라 금융 시스템을 복구할 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그걸 작동하게 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것은 내 문제이면서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함께라면 실패할 리 없습니다.”

일방적 전달인 선동과 달리
소통은 쌍방향으로 이뤄져
신뢰 붕괴로 지도력 와해
합리적 설득으로 통합 나서야

 
“믿음 가져야” 설득에 뱅크런 진정
1 1933년 2월 28일 미국의 한 은행 현관 앞에서 예금주들이 예금 인출 제한에 반발하고 있는 모습. 2 미국 워싱턴 DC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기념관에 있는 노변담화 조각상과 국민 신뢰를 강조하는 글귀. 3 1933년 3월 12일 미국 백악관에서 첫 노변담화를 행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위키피디아·중앙포토]

1 1933년 2월 28일 미국의 한 은행 현관 앞에서 예금주들이 예금 인출 제한에 반발하고 있는 모습. 2 미국 워싱턴 DC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기념관에 있는 노변담화 조각상과 국민 신뢰를 강조하는 글귀. 3 1933년 3월 12일 미국 백악관에서 첫 노변담화를 행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위키피디아·중앙포토]

지금으로부터 꼭 84년 전인 1933년 3월 12일 일요일 밤 10시(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가 라디오로 연설한 13분짜리 담화문이다. 1933년 2월부터 미국 은행들이 예금인출사태를 겪자, 3월 6일 루스벨트는 은행 영업을 정지시켰고, 9일 미국 연방 의회는 비상은행구제법(EBA)을 통과시켰다. 루스벨트의 라디오 담화 다음날인 13일에 다시 영업을 재개한 은행들의 예금인출사태는 진정됐다. 미국 국민은 따로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현금을 은행에 예치했고, 미국의 증권 시장은 폭등을 기록했다.
 
은행 영업 정지 전의 미국 상황은 너도나도 은행 예금을 인출하여 금융시장 파탄의 길로 가고 있었다. 예금이라는 것은 은행 파산 전에만 인출이 가능하고, 파산 후에는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다. 은행이 파산하지 않는다면 예금을 꼭 당장 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대공황 상황에서 은행들의 파산 가능성이 거론되었고, 자신만 예금을 인출하지 않다가는 돈을 날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남보다 먼저 예금을 인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금주들이 불필요한 자금을 인출하지 않아야 금융 시장은 정상화된다. EBA 및 그 후속 조치와 같은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국민의 불안 심리를 잠재울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라디오로 직접 국민에게 호소했고, 미국 국민은 루스벨트의 담화를 진솔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예금인출사태는 해결됐다.
 
1933년 5월 7일 일요일 밤 루스벨트는 라디오 방송으로 뉴딜정책에 대해 설명했는데, 방송 직전 미국 컬럼비아방송사(CBS)가 이를 두 번째 노변담화(爐邊談話, fireside chat)로 불렀고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노변담화로 불리고 있다. 노변담화는 1933년 3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총 30차례에 걸쳐 짧게는 11분(유럽 전쟁과 관련된 1939년 9월 방송), 길게는 45분(무기한 국가비상상태 선포에 관련된 1941년 5월 방송) 동안 방송됐다. 평균 청취율은 평시가 약 20%, 전시에는 약 60%로 집계됐다.
 
물론 루스벨트나 미국 국민이 실제 화로(火爐) 옆에 앉아서 말을 하거나 들은 것은 아니다. 마치 늦은 밤 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라는 의미에서 노변담화로 불렀다. 루스벨트의 노변담화는 대통령과 국민을 각기 ‘I(나)’와 ‘you(너)’로 지칭했고, 권위적이지 않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말투였다. 또 담화 내용도 국정에 관한 중요한 정보 그리고 국민에 대한 격려와 부탁으로 채워져 있었다.
 
노변담화는 거짓 소문을 가라앉히고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수용을 이끌어 루스벨트에 대한 미국 국민의 신뢰를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노변담화를 청취한 미국 국민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루스벨트와 친밀한 관계라거나 정책결정 집단의 일원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되고 있다. 루스벨트가 결혼생활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독재자에 버금가는, 전무후무한 네 차례 대통령 당선의 배경에는 노변담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미국 대통령은 대(對)국민 담화를 국정 수행의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한 이후에도 트윗을 계속하는 이유는 대통령 당선뿐 아니라 대통령직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미국 대통령의 첫 라디오 연설은 루스벨트의 노변담화가 아니다. 루스벨트의 전임자인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1929년과 1931년 라디오 연설 방송을 실시했다. 다만 후버의 연설은 내용이나 분위기에서 국민을 설득하는 정도가 루스벨트보다 못했을 뿐이다.
 
루스벨트 자신도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에 이미 라디오 연설을 행한 바 있다. 루스벨트는 뉴욕 주지사 시절인 1929년 4월 3일 처음으로 라디오 담화를 방송했다. 당시 뉴욕주 의회는 반대 정파인 공화당이 다수당이었는데, 루스벨트는 자신이 원하는 법안이 주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뉴욕 주민들이 의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행사해 달라고 호소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인 시절의 노변담화도 당시 미국 신문들이 공화당 의견에 가까운 의견을 내던 상황에서 나왔다. 즉 국민과의 대화 필요성은 엘리트의 협력을 얻지 못할 때 더욱 체감되는 것이다.
 
엘리트 협력 얻지 못할 때 더 필요
엘리트를 거치지 않고 다수의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은 라디오 개발로 더욱 큰 효과를 내게 됐다. 노변담화가 시작된 1933년 3월은 독일에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라디오 방송을 우정국 산하에서 계몽선전부 산하로 옮겨 직접 관장하기 시작한 시절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독일 국민에게 생생히 전달됐고 라디오는 히틀러와 독일 대중을 연결하는 주요한 매체 가운데 하나였다. 루스벨트나 히틀러 모두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 라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1인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루스벨트의 라디오 활용은 소통의 일환으로, 히틀러의 것은 선동의 일환으로 구분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소통과 선동은 작동 방식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같은 광장의 정치를 두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통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선동으로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과 선동은 여러 점에서 서로 다르다. 소통은 선동과 달리 쌍방향성을 전제한다. 선동이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면, 소통은 대중으로의 방향뿐 아니라 대중에게서 나오는 방향을 포함한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에게서 나오는 방향만을 중시하는 것 또한 올바른 소통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수의 뜻을 중시하되 소수의 의견도 반영하는 것이 소통이다. 소수의 생각도 그 크기만큼은 반영하는 것이 소통이라면, 선동은 대체로 겉으로 드러난 다수 의견을 전체 의견으로 단정한다. 또 소통이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것이라면, 선동은 배아픔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국민 화합을 지향하는 반면에, 선동은 국민 증오심을 부추겨 이를 이용한다. 소통과 달리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선동에는 언젠가 후폭풍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70년대 통치방식 고수하다 탄핵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로 대한민국 국가지도자를 둘러싼 혼란은 이제 가닥을 잡았다. 대통령 지도력의 와해는 국민 신뢰의 붕괴에서 기인한다. 대통령과 국민 간의 소통은 대통령 당선 전보다 대통령 취임 후에 더욱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국민의 신뢰 수준을 노변담화라는 소통으로 제고시킨 루스벨트와 달리, 박근혜 전(前)대통령은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잘 파악하지 못했으며 대신에 근시안적인 충성을 신뢰로 이해한 것 같다.
 
소통과 리더십의 방식은 정보기술 발전에 따라 진화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의 방식은 쌍방향 기능이 강화된 것이라 그 운용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대한민국 초유의 사태는 40여년 전의 1970년대 통치 방식을 고수해서 벌어진 결과였다. 헌법재판소 탄핵 선고문에 “피청구인은 최서원의 국정개입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그에 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 … 사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를 단속 …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 압수수색도 거부 …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번 대통령 탄핵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단임제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첫 사례이다. 이로 말미암아 향후 국가지도자들이 재임 기간 내내 정치 불안정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국정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임기를 못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국가지도자가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국민 소통과 국정 수행에 최선을 다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국가지도자는 제도적 조치가 동반된 합리적인 설득으로 국민의 협력과 통합을 이끌어 국가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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