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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원자탄이란 괴물 보유해야”

중앙선데이 2017.03.12 02:55 522호 32면 지면보기
1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10년이 걸렸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첫 번째 핵실험 성공에 환호하는 과학자들.

1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10년이 걸렸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첫 번째 핵실험 성공에 환호하는 과학자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 60년대에 원자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했다면 중국은 대국 대열에 끼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국제적 지위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처음엔 “위력 과장 말라”던 마오
국·공 전쟁 승리 기미 보이자 관심
극비리에 회의 소집해 개발 시작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인류 최초의 원자탄을 투하했다. 3일 후 나가사키(長崎)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여 만명이 사망하고, 두 도시는 쑥대밭이 됐다. 옌안(延安)의 중공 중앙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가 원자탄 투하 소식을 1면에 보도했다. “불길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모든 생물이 타 죽었다.”
 
마오쩌둥은 보도를 믿지 않았다. “말 같지 않은 기사”라며 신문을 던져버렸다. 전화기 들고 보꾸(博古·박고)를 연결하라고 호통쳤다. 마오쩌둥이 당의 군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당을 대표하던 보꾸는 해방일보의 책임자였다.
 
해방일보는 일본 패망이 임박했다며 경축 분위기였다. 기자들과 술잔 나누던 보꾸는 마오쩌둥의 전화를 받으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속사포처럼 퍼부어대는후난(湖南) 사투리가 어찌나 컸던지 방 안에 있던 사람이 모두 들을 정도였다. “보꾸! 너 어디 명당자리라도 구해놨느냐? 이런 허무맹랑한 오보를 낸 이유가 뭐냐? 다른 동지들과 당장 이쪽으로 와라.” 보꾸와 편집 간부들은 한 시간 이상 마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더 이상 원자탄의 위력을 과장하지 마라.”
 
이튿날 미국 여기자가 마오쩌둥을 방문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나누던 중 원자탄 얘기가 나왔다. 여기자가 허수아비(scarecrow)라고 하자 마오는 틀렸다며 ‘Paper Tiger’가 맞다고 했다. “원자탄은 미국 반동파들이 사람 겁주려고 만든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2 핵실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동원된 8·1 영화제작소 촬영팀. [사진=김명호 제공]

2 핵실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동원된 8·1 영화제작소 촬영팀. [사진=김명호 제공]

 
4년 후 국·공 전쟁에서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마오쩌둥은 원자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불렀다. “외국 출장 가는 물리학자 첸싼창(錢三强·전삼강)에게 돈을 줘라. 프랑스에 들러서 원자탄에 관한 도서와 자료, 실험기구들을 깡그리 수집해 오라고 일러라.”
 
그해 여름(1949년 8월 29일) 소련이 1차 핵실험에 성공했다. 10월 1일 개국을 선언한 마오쩌둥은 소련을 방문했다. 체류기간 동안 평소에 안 보던 영화를 많이 봤다. 핵실험 기록영화를 보고 잠을 설쳤다. 귀국 후 첫 번째 회의에서 원자탄을 언급했다. “소련에 간 보람이 있었다. 영화로 원자탄실험 보고 진땀이 났다. 미국도 있고, 소련도 있다. 우리도 소홀히 넘길 물건이 아니다. 원자력 연구를 전담할 연구소를 분야별로 20개 정도 만들어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에 있는 중국 과학자들에게 귀국을 권해라.”
 
프랑스에 있던 퀴리 부인의 딸 졸리오 퀴리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귀국을 결심한 방사능 전문가 양청쫑(楊承宗·양승종) 편에 마오쩌둥에게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원자탄을 반대하려면 원자탄을 보유해야 한다. 원자탄은 생각보다 무서운 물건이 아니다. 원리도 미국인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나는 중국의 핵 연구를 지지한다.” 적은 양이었지만, 직접 만든 라듐염도 양청쫑에게 선물했다.
 
집권 2년 차에 들어선 소련의 흐루쇼프가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양국 고위층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거드름을 피웠다.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면 말해라.” 마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원자력과 핵무기에 흥미가 있다. 소련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늘 그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 흐루쇼프는 손사래를 쳤다. “그 물건은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돈도 많이 든다. 우리는 한 가정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핵우산 밑에 있으면 된다.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물건에 돈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만든 다음에도 창고에만 처박아두고, 시간이 지나면 또 만들어야 한다. 그런 낭비가 없다.”
 
마오쩌둥은 심사가 뒤틀렸다. 극비리에 중앙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와 함께 첸싼창과 과학원 부원장 리스광(李四光·이사광)을 대동하고 나타나 입을 열었다. “원자탄이 과연 필요한지를 토의하자. 나는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먼저 남을 공격할 일은 없다. 우리를 무시하고 공격하면 우리는 방어하고 반격해야 한다. 그것도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방어라야 한다. 그러려면 어제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비행기와 대포도 많아야 하지만 원자탄이 있어야 한다. 원자탄 끼고 있는 것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원자탄인지 뭔지 하는 괴물을 보유해야 한다. 이견이 있으면 말해라.” 다들 마오의 기세에 눌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기분이 좋았다. “원자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이라며 만찬을 제의했다. 마오의 오른쪽에 펑더화이, 왼쪽에 리스광이 앉았다. 첸쌍장은 마오의 건너편에 자리했다. 요리 네 개에 탕 한 개가 기본이던 시절이었다. 이날은 달랐다. 마오가 손수 술을 따르고, 요리도 평소보다 두 개 더 많았다. 건배 제의도 직접 했다. 중국 핵무기 개발의 막이 올랐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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