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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식 개방·관용 무시했다 곤경 처해

중앙선데이 2017.03.12 02:44 522호 15면 지면보기
17세기 위그노 탄압했던 프랑스
위그노를 위협하는 구교 병사. [중앙포토]

위그노를 위협하는 구교 병사. [중앙포토]

개방과 관용으로 번영을 추구한 네덜란드와 달리 프랑스는 무관용의 종교 정책에 따른 내부 갈등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 위그노로 불리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은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뱅주의를 신봉했는데, 이 때문에 신도 중 상공업자가 특히 많았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기본적인 철학이었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검약하게 생활하라는 개신교도들의 종교관이 자본의 축적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끈 비계획적이고 비동력적인 힘이 됐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제조업과 상업의 핵심을 맡았던 위그노들은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가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처벌하고 이를 밀고한 이에게 몰수 재산의 4분의 1을 주는 위그노탄압법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 때문에 1562년 위그노 전쟁을 겪었지만 다시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천 명이 학살되는 박해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나바라의 군주 앙리가 부르봉 왕조를 열고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됐다. 개신교도였던 그는 국가 통합을 위해 자신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1598년 4월 13일 위그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차별을 금지하는 낭트 칙령을 내렸다. 개방과 관용으로 분열을 치유하려 했던 앙리 4세는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후손인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낭트 칙령을 폐기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다. 관용을 저버린 종교적 도그마 정책은 프랑스에 결정적 타격을 안겼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위그노의 국외 탈출이 줄을 이으면서 프랑스 경제가 흔들린 것이다. 위그노들은 가까운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바다 건너 영국이나 멀리 프로이센까지 이주했다. 일부는 네덜란드를 거쳐 신대륙으로 이주해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뉴암스테르담으로 개척해 1664년 이후 영국 식민지로 바뀐 뉴욕에 대거 정착했다. 1685~1689년에만 20만~30만의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났다. 이는 프랑스 경제의 몰락 원인을 제공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고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가 기요틴에서 처형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네덜란드는 반대로 자본과 인재를 얻어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영국 청교도들도 네덜란드를 거쳐 신대륙으로 이주하면서 네덜란드와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라의 문을 닫아거는 폐쇄성이 한 공동체의 운명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다. 네덜란드 자유당은 물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되새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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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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