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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로 우뚝 섰다가 닉슨처럼 거짓말로 추락

중앙선데이 2017.03.12 00:05 522호 3면 지면보기
[포스트 탄핵 정국] ‘무신불립’ 박 전 대통령 정치역정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한 현실을 잘 드러낸 사자성어다. 원칙과 신뢰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온 박 전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 2013년 상반기만 해도 60%대까지 치솟았던 그의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과 관련한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5%까지 곤두박질쳤다. 세 차례 대국민담화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사과도 해 보고 억울함도 호소해 봤지만 신의를 회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8년은 영애, 18년은 야인으로
흉탄에 부모 잃고 파란만장한 삶
‘급난지붕’ 최순실이 비선 실세로
헌재 “중대한 국민의 신임 배반”

결백 주장하며 되레 반발만 키워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문에 그 이유가 담겨 있다. 헌재는 지난 10일 “피청구인(박 전 대통령)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국민담화에서 진상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했다. 일련의 언행을 보면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 하고 국민 앞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란 얘기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을 은폐한 사실이 드러나 탄핵 위기에 몰렸고 결국 자진사퇴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4년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터졌을 때 “‘찌라시’에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2014년 12월 7일 새누리당 지도부 초청 오찬)이라며 비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통령 연설문 등이 담긴 최순실의 태블릿PC가 세상 밖으로 나오자 그의 실체는 인정했지만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2016년 10월 25일 대국민담화)이라며 결백을 주장해 반발만 키웠다.
 
1987년 개헌 이후 첫 과반 득표(51.6%) 대통령이란 영예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파면된 첫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로 뒤덮였다. 첫 여성 대통령, 첫 부녀 대통령 등의 상징성도 그 의미가 퇴색됐다. 사실 박 전 대통령이 65년 인생 중 겪었던 영욕(榮辱)의 순간들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18년은 영애(令愛)로, 18년은 야인(野人)으로, 이후 18년은 정치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박 전 대통령.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고난을 벗삼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등 그간의 저서 제목에도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피격사건으로 사망하고 79년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흉탄에 피살되자 그는 세상과 담을 쌓기 시작했다. 부친의 9일장을 치른 뒤 두 동생인 근령·지만과 함께 청와대를 나와 부모가 살던 서울 신당동 자택에 둥지를 틀었다.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부친의 업적 재평가에 힘을 쏟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은둔생활에 가까웠다. 부친의 측근들이 싸늘하게 돌아섰을 때 지근거리에서 박 전 대통령을 보필한 게 최순실 일가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 전 대통령은 90년 9월 일기장에 ‘권력의 무상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권력은 칼이다. 큰 권력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지만 정작 그 큰 권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당사자다. 그 칼을 마구 휘둘러 쌓이는 원망·분노·복수심 등은 되돌아와 그의 목을 조른다.” 2007년 발간한 자서전에는 “고마운 사람은 나에게 물 한 잔 더 준 사람이 아니라 시류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으며 진실한 태도로 일관된 사람들, 진정 빛나는 이들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최순실과 맺은 ‘급난지붕(急難之朋·위급하고 어려운 때 도와주는 벗)’의 연이 권력 남용으로 변질돼 박 전 대통령의 목을 조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정치인 박근혜’로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그때까지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줄곧 거절해 왔지만 더 이상은 개인의 안위 때문에 국가 위기를 모른 체할 수 없어 정계 입문을 결심했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97년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지지선언을 한 그는 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초선 배지를 달았고 이후 19대 국회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박정희의 유산, 발판이자 한계
정치인 박근혜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 덕에 늘 주목을 받았다. 2002년에는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했다. 박정희의 장녀와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2세대 남북 정치인의 만남은 국제적 이슈가 됐다.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침몰 직전의 위기를 맞았을 때는 당 대표를 맡아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천막당사로 민심을 움직여 50석도 어려울 거라던 총선에서 121석이라는 예상 밖 선전을 거뒀다. 이때 생긴 별명이 ‘선거의 여왕’이다.
 
2006년 5월 20일은 박 전 대통령 스스로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일컫는 날이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 신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를 하다가 ‘커터칼 테러’를 당했다. 오른쪽 뺨에 길이 11㎝의 상처를 입고 60바늘을 꿰맸다. 지방선거 이틀 전 퇴원한 뒤에도 부상 투혼을 벌인 끝에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과의 접전 지역이던 대전을 비롯해 광역단체장 12곳을 휩쓸었다. 선거 결과만 보면 일종의 전화위복이었지만 이날의 상처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각종 미용시술 의혹의 근원이 되는 등 불행한 결말로 이어졌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패배는 정치인 박근혜를 더욱 단단하게 했다.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을 이젠 잊어버리자. 이명박 후보님께서 반드시 정권 교체에 성공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승복연설은 후보 수락 연설보다 더 많이 회자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친이명박계와 선을 긋고 당내 비주류를 이끌며 입지를 다졌다. 특히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여당 소속임에도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약속을 중시하는 정치인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같이 치러진 2012년, 박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답게 잇따라 승전고를 울렸다. 4월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연대에도 불구하고 과반 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12월 대선에서도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2013년 2월 취임식에서 박 전 대통령은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반드시 만들어 신뢰를 얻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2014년 말부터 드리워진 비선 실세의 그림자가 결국 실체를 드러내면서 대통령직 파면이라는 종지부를 찍게 됐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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