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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개비, 그리고 동남동녀 이야기

중앙선데이 2017.03.12 00:02 522호 35면 지면보기
성석제 소설
혹시 따개비죽이라는 음식, 드셔 보셨나요? 따개비는 바닷가에 딱 붙어서 사는 납작한 조개로 몸 크기가 1~1.5㎝밖에 되지 않고 손질이 까다로워서 먹는 곳이 별로 없죠. 저도 몇해 전 울릉도에 가서 처음 먹어봤습니다. 따개비죽만 있는 게 아니라 따개비밥, 따개비칼국수도 있었는데 어쩐지 따개비죽이 제일 맛있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더군요.
 

울릉도 주민 이주시키러 간 김인우
해신 꿈대로 소년·소녀 남기고 떠나
자웅동체 따개비처럼 껴앉고 아사
나중에 돌아와 제사, 풍어제로 계승

울릉도는 오징어를 비롯한 해산물이 풍부하게 나고 명이나물, 부지깽이나물, 더덕 같은 산나물 천국이며 약소·호박엿 등등 먹을 것 천지에 천혜의 비경을 갖춘 보물섬이죠. 하지만 신라 지증왕 때(512년)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복속시킨 이래 육지의 중앙정부에서는 풍랑과 외침, 재해 등이 자주 발생한다는 이유로 때로는 섬을 비우고(空島), 때로는 주민을 이주시키는(徙民)는 정책을 되풀이해서 시행했다고 하지요. 그만큼 살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래 유명해진 명이나물은 울릉도에서 눈이 많은 겨울을 지나며 먹을 게 떨어진 사람들이 산마늘을 캐먹고 목숨(命)을 이은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울릉도에 처음 갔을 때 제가 맨먼저 먹으려 했던 건 울릉도의 약소였습니다. 20대의 어느 겨울 절간에서 한철을 함께 보낸 고시공부 한다던 친구가, 긴긴 밤을 보내며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때 울릉도 약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지요. 울릉도의 험준한 절벽 사이로 난 벼랑길로 지게에 얹혀간 송아지가 고원의 특산 약초와 풀을 먹고 자란 뒤 사람들의 눈물 속에 도축되고 고기로 나뉘어져서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나요. 그만큼 맛이 특별하고 냄새마저 향긋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창작 전설’이었지요.
 
두 번째로 먹으려 했던 건 울릉도의 오징어입니다. 그것도 배오징어라 해서 막 잡은 오징어를 배 안에서 동해의 해풍과 뜨겁고 맑은 햇볕에 말린 것인데 라이터 불기만 닿아도 도르르 말릴 정도로 탄력과 쫄깃거리는 맛이 일품이라는 거였죠. 극소량밖에 생산되지 않아서 운이 좋아야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울릉도에서만 나는 산채로 만든 비빔밥이었습니다. 네 번째가 뿔고둥· 소라· 전복 등의 자연산 해산물로 만든 회, 그 다음이 홍합밥·호박엿...그런데 정작 제가 가장 먼저 먹게 된 건 울릉도 토박이가 추천하고 데리고 간 따개비 음식 전문점의 따개비죽이었지요.
 
따개비죽을 맛나게 먹고 한때 우산국의 수도였다는 서면 태하리로 향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짙푸른 동해가 가슴이 벅차게 펼쳐지고 환하고 밝은 햇빛이 “안녕하시오!” 하고 환영사를 던져오는 것 같더군요. 바닷가 마을숲 안쪽에 단청이 칠해진 신당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성하신당(聖霞神堂)이라는 성황당으로 울릉도의 수호신이라는 소년과 소녀의 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보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왜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소년·소녀일까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417년(조선 태종 17년), 안무사 김인우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울릉도의 거주민을 전원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병선 두 척을 이끌고 지금의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도착했습니다. 섬 전체의 순찰을 마친 뒤 다음날 출항하여 귀환할 작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해신(海神)이 나타나더니 “일행 중 동남동녀, 곧 소년과 소녀 하나씩을 섬에 남겨 두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인우는 꿈을 개의치 않고 이튿날 출항을 하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던 풍랑이 몰아쳐서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보냈으나, 바람이 멎을 기세는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심해져 가기만 했다지요. 결국 안무사는 꿈을 기억해내고 소년과 소녀를 한 쌍 불러서는 자신이 숙소에 지필묵을 두고 왔으니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소년과 소녀가 물건을 가지러 간 사이 풍랑이 거짓말처럼 멎고 장판을 깔아놓은 듯 바다가 잔잔해졌지요. 안무사는 지체없이 배를 출발하게 했습니다. 소년과 소녀가 배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배는 벌써 큰 바다 멀리로 나아가고 있었겠지요.
 
육지로 무사히 돌아온 안무사와 일행은 섬에 두고 온 소년과 소녀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조정의 명을 받고 울릉도로 가게 된 안무사는 제일 먼저 소년과 소녀의 행방을 찾아보게 했습니다. 이윽고 자신이 묵었던 숙소 근처에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백골이 되어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안무사는 억울하게 죽은 동남동녀의 혼백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곳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했답니다. 그 후 매년 음력 3월 초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한해의 풍작·풍어를 기원하고 바다에서의 무사함을 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 건조한 선박의 진수식이 있을 때에도 제사를 지낸다고 했습니다.
 
성하신당 앞바다의 바위며 방파제에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삿갓 모양의 단단한 석회질 껍데기를 한 따개비는 부착성이 강해 웬만한 파도에는 떠내려가지 않고 일생을 한자리에 붙어서 삽니다. 공기 중에 노출되었을 때는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껍데기의 입구를 꼭 닫은 채 있다가 몸이 물에 잠기면 입구를 열어 넝쿨같이 생긴 여섯 쌍의 만각을 휘저어 플랑크톤을 잡아먹지요.
 
따개비는 자웅동체, 암수 한 몸입니다. 한 자리에서 서로 껴안고 죽어 백골이 된 동남동녀를 연상케 하더군요. 따개비는 번식을 위해 교미를 할 때(교미를 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토록 맛있는 따개비죽을 얻어먹을 수 없었겠지요) 유연한 생식기를 옆에 사는 개체에 뻗어 번식을 한다네요. 상대도 암수 한 몸이니 구태여 암수를 구별할 필요가 없겠지요.
 
울릉도의 따개비는 다른 곳의 따개비보다 훨씬 크고 식감이 쫄깃쫄깃하며 맛이 풍부하답니다. 동남동녀는 거친 바다와 험준한 산령으로 덮인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삶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따개비는 맛있는 죽이 되고 칼국수가 되고 밥이 되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일부가 되겠지요. 고마운 일입니다. 때로 눈물겹게 미안하고.
 
미안하다, 아이들아. 말하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600년 전에 이미 소년·소녀였던 분들이네요.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꼭 기억하겠습니다, 할머니.
 
 
성석제 : 소설가
※‘성석제 소설’은 성석제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험적 칼럼으로 4주마다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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