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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TALK] 아줌마·할머니도 뮤지컬을 보고 싶다

중앙선데이 2017.03.12 00:02 522호 29면 지면보기
민망하지만, 40대 중반 나이에 최근 가장 열광한 공연을 꼽으라면 지난달 24일 개막한 뮤지컬 ‘꽃보다 남자 The Musical(사진)’이다. 부유층 자제만 다니는 명문사립고의 지배자인 ‘F4’와 그들에게 잡초같은 영혼으로 맞서는 평범한 여주인공의 유치찬란한 첫사랑 이야기에 푹 빠진 나머지, 커튼콜에 주인공인 빅스(VIXX)의 켄이 등장하자 아줌마 체면도 잊고 10대팬들과 하나가 되어 괴성을 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옛날 밤새며 읽던 순정만화의 원작을 찢고 나온듯한 싱크로율 탓이다.
 

킬러 콘텐트는 어디에

만화 『꽃보다 남자』는 1992년부터 2003년까지 12년간 일본의 만화잡지 ‘마가렛’에 연재됐고, 단행본 누계 6100만부를 달성해 일본 순정만화 역대 발행부수 1위를 달성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물론 대만 드라마, 일본 드라마, 한국 드라마까지 차례로 제작돼 아시아 전역에 ‘F4’ 열풍을 불러일으킨, 자타공인 ‘킬러 콘텐트’다. 만화 완결 13년만인 지난해 뮤지컬로 부활해 킬러 콘텐트의 위상을 재확인 중이다.
 
한국에서도 90년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에 해적판이 돌기 시작해 일찌감치 마니어들을 사로잡았다. 만화 대여점의 신간 입고를 기다리다 못해 인터넷을 뒤져 누군가 스캔해 올려준 최신 ‘마가렛’을 열람하곤 했다. ‘12년 연재’란 누군가에겐 초중고 소녀시절을 관통하거나 혹은 20대 청춘을 온전히 함께한 소중한 동반자적 의미부여가 가능한 세월이다.
 
그래서 기대했다. 공연장에 나와 같은 아줌마들이 많을 것이라고. 그런데 객석은 여느 뮤지컬 공연장보다 더 젊었다. 성민(슈퍼주니어)·창섭(BTOB)·켄(VIXX)·민(미쓰에이) 등 아이돌 캐스팅에 열광하는 10~20대 틈에서 나는 외계인이었다.
 
그 시절 대여점에서 함께 청춘을 보낸 한국의 아줌마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인터파크 2016년 결산에 따르면 공연 티켓의 여성 구매비율 69%중 20~30대 비율이 70% 가까이 차지하는 반면, 40대는 10% 대, 50대 이상은 한자리수를 맴돌고 있다.
 
한류스타가 출연하는 뮤지컬에는 아줌마 관객이 많다. 일본과 중국 팬들이다. 지난 1월 공연된 김준수의 입대전 고별작 ‘데스노트’ 객석에도 나이 지긋한 외국인 여성 비율이 상당했다. 이들이 오로지 스타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건 아니다. 몇 해전 차승원이 출연한 한일합작 연극 공연 당시 옆 자리에 앉았던 초로의 일본인 여성은 “차승원을 보러 왔지만 연출가 정의신의 작품을 원래 좋아한다”고 했다. 일본의 주류 뮤지컬의 한 축인 다카라즈카 극장 풍경은 거의 충격적이다. 관객이 온통 아줌마, 할머니여서다.
 
저들이라고 날 때부터 그랬을까. 70년대 침체에 빠졌던 다카라즈카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이 전설의 순정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였다. 동일 콘텐트를 ‘오스칼편’ ‘오스칼과 앙드레편’ ‘페르젠편’ ‘페르젠과 앙뜨와네트편’등으로 다변화시켜 40년 넘게 꾸준히 공연중이다. 다카라즈카 뿐만 아니다. 지난해 연재 40주년을 맞은 최장수 순정만화 ‘유리가면’과 ‘왕가의 문장’도 최근 무대화돼 어르신들을 불러모았다. 이들에게 순정만화 원작의 공연이란, 잠시나마 팍팍한 일상을 잊고 꿈많던 소녀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마법의 구슬인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 뮤지컬계는 소재 발굴의 레이더가 너무 먼 곳을 헤매고 있다. 중장년 여성층이라는 블루오션의 황금모래밭이 가까이 있는데 말이다. ‘미스터 블랙’ ‘영어 선생님’ ‘별빛 속에’ ‘비천무’ ‘북해의 별’ ‘사랑의 아테네’… 나의 소녀시절을 설레게 했던 판타지가 무대에서 살아난다면 어떨까.
 
다시 봄이다. 겨우내 꽁꽁 언 마음이 꿈틀대기 시작하는 계절, F4는 노래한다. “사랑을 해봐요. 꽃 피는 계절에~.” 이제 만화책을 펼치기에 다소 민망해진 중년들은 공연장에서라도 좀 설레보고 싶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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