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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술을 부르고, 안주도 술을 부르고

중앙선데이 2017.03.12 00:02 522호 28면 지면보기
술’ 하면 떠오르는 최강자가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이분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주(酒)림계에 이런 고수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전 직장의 대리 시절에 만난 그분은 4개 사업부를 이끌고 있던 부문장이었다. 날카로운 눈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기운, 엄숙함. 더 무서웠던 건 전체 회식 때였다. 회식한다고 온갖 약을 다 먹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안 취하는 약, 위·간 보호제 등을 다 챙겨 먹었다.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23>
주림(酒林) 최고수와의 만남"

초긴장 상태에서 시작된 전체 회식은 살벌했다. 무작위로 지목받은 사람은 구호를 외쳐야 한다. “저는 ‘우리 사업부의 상반기 실적 달성을 위하여!’를 삼창하겠습니다” 하면 부문장님이 고개를 끄덕하며 사인을 준다. 그 뒤에 “잔 잡고, 잔 들고”를 외치는데, “잔 잡고”에서 한 명이라도 잔을 들면 전체가 원샷. “잔 들고”에서 모두 똑같이 잔을 들어야 한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삼창 구호가 틀리면 또 원샷. 떨려서 구호를 실수해도 원샷. 조금이라도 틀리면 어김없다. 누군가 슬쩍 화장실에 가도 그 줄은 원샷.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취자가 속출한다.
 
가끔은 부문별로 부문장님과의 대화의 시간도 마련됐다. 술 잘 마시는 선수들이 차출됐고 난 어김없이 명단에 들었다. 소수 정예들이었기에 더욱 하드코어였다. 짧고 굵게 강도 높은 술자리가 이어지고, 역시나 전사자가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엄격한 주도(酒道) 교육을 받은 내가 아닌가! ‘여기에서 무너질 수는 없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자연스레 술 잘 마시는 대리로 찍히게 되었다.
 
되돌아 보면 무시무시한 시간. 하지만 그 회식을 통해 모두가 사업부의 목표를 위해 대동단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인사차 안부 전화를 드렸다가 “얼굴 봅시다”는 부문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음식도 좋고 주류 리스트가 좋은 이자까야로 예약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어디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이곳을 떠올렸다.
 
반포IC 근처의 골목길에 위치한 이곳은 작고 아담하지만 단골 손님이 탄탄한 곳이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어렵다. 분노지? 하면 독특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어로 ‘문(文)이라는 글자(字)’라는 뜻. 문동택 오너 셰프의 이름에서 성을 땄다. 한마디로 ‘문씨네’다. 그는 일본의 츠지 조리학교를 졸업하고 2014년 이곳을 오픈했다. 음식과의 궁합이 좋은 식중주로서의 일본술의 매력을 엿보게 된 그는 ‘와인도 사케도 음식과 먹을 때 더욱 맛있다’는 생각에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도 취득했다. 오너 셰프가 요리에 잘 어울리는 술을 골라 주는 곳. 이런 곳이라면 부문장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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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오랜만에 다시 주림 고수를 영접했다. 자상한 미소를 짓고 계셨지만 내 몸은 구석구석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오늘의 음식과 술은 모두 셰프의 손에 맡기고 술 자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문 셰프님 잘 부탁 드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코스. 야마구치 지역의 사케 ‘타카 토쿠베츠 준마이‘가 나왔다. 여기서 타카(貴)는 ‘귀하’라는 뜻. 한 마디로 귀한 사람에게 바치는 술이다. 식중주의 왕이라는 별명이 있고, 술 좋아하는 분이 길게 맛있게 드실 수 있는 술이란 설명에 부문장님이 끄덕. 부드러운 질감과 깔끔한 피니쉬. 스타터로 나온 단새우의 녹진한 맛,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맛과 잘 어우러졌다. 머리는 남겼다가 튀김요리로 부탁해 맛보았다.
 
다음은 연어 아보카도. 간장을 이용한 일본식 와후 드레싱과 발사믹 식초를 곁들여 낸다. 생 연어와 싱싱한 아보카도가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만족스럽게 맛보고 계신 부문장님을 보며 셰프가 거든다. “저희 가게에는 맵거나 짜고 자극적인 음식이 없습니다. 특히 술과 페어링 할 때는 담백한 맛이 잘 어울리기 때문에, 조미료를 쓰지 않고 재료 그 자체의 맛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셰프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사케 한 병이 비워졌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셰프는 조용히 보리소주를 가져왔다.
 
이어서 나온 항정살 미소야끼. 항정살을 미소에 재워두었다 불에 구워낸 요리다. 고기의 기름진 맛을 보리 소주가 개운하게 잡아준다. 이 보리 소주의 이름은 ‘친구(ちんぐ)’. 예로부터 한반도와의 무역 중계지로 번영해온 이키 섬에서 생산된 술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지었단다. “뜻이 좋은 술이네. 자네도 한 잔 받게.” 좋은 술 가져왔다가 셰프는 얼떨결에 한 잔 크게 원샷을 해야 했다.
 
다음은 돼지고기찜샤브. 만두 찜기를 활용해 고기에 살짝 후추간을 하고 숙주·버섯·배추·시금치 등과 함께 쪄낸다. 재료는 계절 따라 바뀐다. 슴슴하고 맛볼수록 건강해지는 느낌. 술로 달리고 있는 와중에 이런 요리는 그저 반가울 뿐이다. 짬 날 때마다 열심히 입으로 가져갔는데 “술은 안 마시고 안주만 먹습니까?”라는 말씀에 헉. 다시 술 잔이 정신없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다른 술도 더 내달라”는 주문에 고구마 소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감 시간 즈음해 후식으로 모찌리도후(일본식 찹쌀떡 두부)를 가져온 셰프는 “음식과 술이 마음에 든다”며 “한잔 합시다”는 부문장님 말씀에 얼떨결에 합석, 휘몰아치는 술잔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날 장렬히 전사했다. ●
 
 
이지민 : ‘대동여주도(酒)’ 콘텐트 제작자이자 F&B 전문 홍보 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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